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루시아 Oct 05. 2022

우리

우리, 아니 어떨 땐 그냥 나



이제껏 참 두루뭉술하게 살았다. 나와 특별히 가까운 우리 안에서 특별히 모난 것 없이, 우리끼리 별스럽게 굴 것 없이 아늑한 날들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게 썩 나쁘지 않다.


‘우리’라는 말은 참 따뜻하고 예쁘다. 우리라는 말로 모은 대개 모든 것에는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서린다. 특별히 너와 나 사이를 가르지 않아도 하나로 만들어주는 굉장히 큰 힘을 가졌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수식하는 말을 더 따뜻하고 예쁘게 만들어준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딸… 어느 것 할 것 없이 우리의 수식을 받으면 그만큼 더 힘이 느껴지고 뭉근하게 익은 느낌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우리 나이’라는 말은 이제껏 펼쳐 온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우리 나이에~’. 뒤따르는 조사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듣고 자란 말의 편견 때문인지 몰라도 이 말을 들으면 괜히 샘솟던 자신감도 한없이 기운 빠진 바람인형이 된다. 20대까지는 뭘 해도 잘 될 줄 알았고, 잘 됐으며 조금 잘못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30대가 되고 그도 이제 몇 안 남은 후반이 되니 나도 글쎄 ‘우리 나이에 뭘~’ 하고 괜히 움츠러드는 것이다. 이 말은 더 나이 들어도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뭔가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는 말 같고 굉장히 소심해지는 느낌이다. 뭐든 해 보고 싶어도 ‘우리 나이’에로 시작하는 말은 그 자체로 의심의 싹을 품은 것 같다. 하지만 사실 힘들 때마다 기대온 말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갖는 든든한(?) 기운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일 테다.


퇴근길이었다. 지친 나는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길이었다. 십여 개 남짓한 계단은 꽤 가팔랐고 나는 내려가는 참인데도 힘이 쏙 빠졌다. 그런데 저 반대편에서 또각또각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땅을 더 많이 보고 걷는 나는 그 소리의 주인이 5cm가량 되는 새빨간 구두라는 것을 먼저 알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구두의 주인이자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나보다 더 멋지게 눈썹을 그리고, 파마머리와 빨간 치맛자락을 나풀대며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핑 도는 느낌이었다. 짧은 생각에 순간, 나도 못 신는 걸 하다가 아차 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늘 우리 나이에 뭘~ 하는 핑곗말을 외쳐왔었을 내가 부끄러워졌다. 내가 만난 그 할머니는 ‘우리 나이에’라는 말 뒤에 숨은 분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알고 계셨던 분 같았기 때문이다.


박완서 선생님은 나이 마흔에 등단을 했고, 퇴근길에 만난 한 할머니는 그보다 더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으니... 어쩌면 어떤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다수의 방패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나 중심이 되어간다고는 하나, 그래도 우리를 더 강요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말보다 따뜻한 느낌이 들지만 우리보다 나 그 자체로 어울리는 말과 ‘우리’는 이질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우리보다 나로 존재하고 싶을 때가 더 많아지는 순간에는 ‘우리’보다 ‘나’와 ‘너’ 각각이 그 자리를 설명하는 데 좀 더 유용할 것 같다. 할머니의 빨간 뾰족구두도 그저 취향일 뿐이었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만큼이나 할머니의 몸짓에는 힘이 있었으니, 내가 이상하리만치 부정적이게 느꼈던 ‘우리 나이에’라는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 같다.


나와 너로 묶을 수 있는 우리라면 좀 더 따뜻하게, 굳이 우리라는 이름 없이 홀로서기가 가능하다면 그 나름대로 품으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길이겠구나 생각했다. 뭐든 엮으려 하기보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며 그래도 뭔가 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니라 뭐든 할 수 있는 ‘우리’로 늙어 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몇 글자 보탠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무기력과 불안과 우울인 척하는 생활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