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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Nov 14. 2022

어느 가을에

나를 달래며



오랜만에 진주를 벗어나 경주로 가는 길이다. 소도시지만 다소 북적했던 아파트촌을 지나 내 길의 끝이 꼭 하늘과 닿을 듯한 광경 속을 헤치고 가니 정말 다 던져버리고 온전히 나만 남은 기분이다. 어쨌든 이틀은 마음 편히 보내겠단 생각으로, 들썩이는 엉덩이가 티 나지 않게 자세를 가다듬는다.

여름부터 바로 어제까지도 괜히 힘이 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 틈에서 나는 나조차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투정을 부리고, 그것도 되지 않으면 혼자 멍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겪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푸념하면서 제대로 부딪혀보거나 해결할 생각은 않고 그냥 아까운 계절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가을이 왔고, 낙엽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 정신이 깬다.

창밖으로 햇빛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동전처럼 짤랑댄다. 온몸으로 들려주는 가을나무의 속삭임이 유난히 듣기 좋은 날이다. 낮은 건물들 덕분에 하늘도 산도 나무도 모두 가까워지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설핏 평소 내가 살던 소란스러운 도시와 북적임은 어쩐지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활의 편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상에서도 울적해지는 나를 달래기에 충분한 무언가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걸었다. 관광지를 목적지로 한 탓에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많았지만 가을의 경주는 계절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았다. 더 조심스럽게 나무들 틈으로, 낙엽 위로 몸을 피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니 사라진 구름의 흔적만큼 내 마음의 짐들도 덜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새파란 마음만 남겼다. 지난날 쉴 새 없이 일하며 지금보다 바쁘게 살았던 어떤 날들을 맘 편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일만큼이나 잦은 쉼 덕분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온전히 쉴 여유가 없던 지난 몇 개월이 나를 더 지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편한 숨으로 둘러본 가을은 너무 고왔다. 지나친 계절이 아쉬웠고 이제 더 늦지 않길 바라며.. 가까이 앉은 가을의 어깨에 기대 쉬면서 가뿐히 내 자리로 가 앉을 여유를 마련했다. 곱게 물든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내 마음의 변화도 함께 느낀다. 갈 때를 알고 부지런히 잎을 떨구는 나무들처럼 나도 더 내려놓을 필요를 느꼈달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가게를 부러 찾아가 잠깐의 수다를 즐기고, 친구 남편이 내려 준 커피 한 모금에 다시 기운이 솟은 오후,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어떤 좋은 것을 본 것보다 잠깐의 휴식이 더 소중했던 날이었다. 해 저무는 대릉원 옆 골목 어느 식당에 노을과 마주 앉아 마시던 새콤한 레모네이드의 짜릿함이 너무도 좋은 오후였다.



일상으로 돌아온 평일 아침, 다시 나를 들볶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쩐지 날 그냥 두지 않는 어떤 하루가 종종 거리며 쉼을 찾는 나를 만든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늘 말로만 산책을 하겠다 외던 나의 입버릇을 정말 실행에 옮겨야 될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걸으면서 느끼는 평화로움과 깊은 사유가 필요한 때다. 멀리까지 갈 여유는 없지만 잠깐씩이라도 나를 돌아볼 여유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충분히 느꼈으니 서둘러야 할 참이다. 복잡해서 돌아갈 길 없는 하루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퍼지르고 앉아 두 발을 비빌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겨울이 와 더 움츠러들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몸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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