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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Jan 10. 2023

신호가 짧아졌다

조급한 마음이 보내는 깜빡임이었다



도보로 10분 거리의 학원에 가려면 꼭 두세 개의 큰길을 건너야 한다. 매번 그 신호를 기다리는 일도 예삿일은 아닌데 다행히 집에서 큰길 하나를 건너고 그다음 길은 내 걸음으로 신호가 거의 딱 맞아떨어졌다. 종종거리며 걷던 다리를 잠시 쉬면 곧 보행자 신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해졌다. 매일 걷던 내 걸음이 느려진 건 아닐 텐데 내가 아직 횡단보도 앞에 서지도 않았는데 신호가 바뀌는 것이다. 고작 2-3초 차이인데도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 길을 급히 건넌 날에는 두 번째 길의 신호 끝 무렵에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넜고, 다리에 알이 꽉 배도록 신경 써서 더 빠른 걸음으로 걸은 날엔 여유롭진 않아도 길을 건너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예전 신호에 적응된 몸을 다시 몇 초 빨라진 신호에 맞추기 위해 조금 더 빨리 걷거나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뀐 신호에 내 몸을 맞추느라 숨을 헐떡이는 날이 많아졌다. 집을 나설 때 조금 여유롭게 나서면 신호 하나 정도는 놓쳐도 그냥 다시 기다리면 될 거라 하지만 집에서나 밖에서 모두 내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니 조금만조금만 하다 내 몸이 더 바빠졌다.


요즘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다시 나를 위해 쉬어가란 의미인지, 배움이나 쉼이 필요하다는 의미인지 자꾸 힘이 꺾이는 나를 주체할 수 없어 힘들었다. 지난해 마지막 글을 쓰면서 23년은 나 돌보기에 조금 더 힘을 쏟아보자 했는데, 시작부터 삐걱거려서 더 조급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에는 온전히 놓고 나를 위해 푹 쉬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놓고 따땃한 햇살 샤워도 했다. 당장 내일이면 밀린 상담 전화를 해야 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지만 누구를 위해 움직이겠는지 모르는 요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두루뭉술하게 나의 하루와 상태를 적고 있지만 실은 점점 더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뾰족해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삐죽삐죽 돋아난 생각들 사이사이를 메워가기로 했다. 계획 없이 또 일 년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크게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바쁜 한 주를 보내고 다시 월요일. 이상하게 신호가 느긋해졌다. 신호를 보고 걷지 않고 내 호흡에 따라 걸었더니 말이다. 이전보다 더 오래 신호를 기다리게 된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호 한 차례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깜빡대는 신호 앞에선 숨도 고르지 못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는데 빨간 정지 신호를 먼저 맞닥뜨리니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 이 신호를 놓치면 다음에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하니 놓치면 안 된다고 걱정하기보다 내 눈앞에 놓인 정지 신호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빨라진 신호는 결국 조급한 내 마음이었나 보다.

이상하게 그 짧은 신호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내 마음에도 변화가 일었다. 먼 일을 걱정하기보다 그때그때 주어진 그 상황에 집중하고 충실하기로 하자며. 깜빡이는 불빛하나가 자꾸 흔들리는 내 마음에 신호로 와서 진행과 정지의 순간을 깨워주고 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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