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루시아 Jan 31. 2023

자전거와 낭만

소박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김신지 작가의 책과 빨강머리 앤 이야기에는 모두 ‘낭만’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쩐지 낭만은 푹 익어가는 계절에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과거를 추억하며 쓰는 말 같아서 자주 꺼내는 말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이야기하는데 이 말을 쏙 빼놓자니 아쉬워서 잠깐 꺼내 쓰고 도로 넣어두어야겠다.


자전거로 바람을 가를 날을 꿈꾼다는 희망사항을 담은 글을 쓴 이후 벌써 여러 달이 흘렀다. 부끄럽게도 딸아이는 여전히 보조바퀴를 떼지 못했으며 자전거에 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나무바구니를 앞세운 크림색 바디의 자전거는 상상 속에서나 만날 뿐이다.

그래도 매튜 아저씨와 앤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의 오랜 낭만을 다시 슬쩍 꺼내본다.

‘네 낭만을 전부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 거란다. 너무 많이는 말고, 앤. 조금은 간직해 둬.’

그래, 나에게 자전거는 여전히 낭만이다. 못 타니까 낭만.


지금은 10년도 더 지난 나의 연애시절, 당시에는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시골집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시골이라 해봤자 내가 사는 곳에서 20-30분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사방이 논밭이었으니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하루에 몇 대 없는 시골버스보다 자주 있는 기차를 타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기차역까지 마중 나온 그의 차를 타고 다시 10여 분. 가서 달리 무얼 한 기억은 없는데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그때 탔던 자전거와 그 뒷자리에 앉아 온몸으로 맞던 그날의 바람. 그 장면은 아직도 액자에 담은 듯 생생하다.

시골이라 달리 할 것도 없어 수다나 떨다가 느닷없이 자전거를 태워준다는 말에 흔쾌히 엉덩이를 뗐다. 내 발로 저어가진 못하지만 바람을 가르는 그 기분은 상상만 해도 즐거워서 남자친구의 허리를 붙들고 냉큼 뒷자리에 올랐었다. 노을이 물드는 오후, 그날따라 바람도 달큼하게 불었다. 덩달아 기분도 달달해져서 그까지 가서 뭘 하나 궁금했을 엄마에게도 내 소식을 전했다. 곧이어 날아온 건 ‘그래, 좋~겠다’는 엄마의 비아냥이었지만 그래, 그날은 그 말도 달게 받았었지.


내가 자전거를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20대가 되어서의 일이지만. 자전거는 한 번 배우면 타는 법을 잊지 않는다는데 그때 자전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지, 내 운동신경이 둔한 것인지 자전거 타기는 나에게 여전히 벽인 동시에 낭만이다.

아직도 남편이 모는 자전거 뒤에 앉아 맞았던 그날의 바람을 잊지 못한다. 정말로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꼭 자전거를 배워서 남편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함께 달리고 싶다. 아니 당장 봄이 오면 공영자전거를 빌려서 자전거부터 배워야겠다. 내가 사는 이곳이 자전거 도시라는데 창밖의 예쁜 풍경들을 자동차만 타고 훑으며 즐기기엔 너무 아쉽다. 그 풍경을 만나는 일도 내겐 낭만일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부러움을 벗고 나를 입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