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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Feb 02. 2023

발자국

남해에서 얻은 조각글 몇.



오랜만에 남해를 찾았다. 늘 비슷한 코스로 많은 인파들 속을 비집고 다녀서 한가로이 보내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나 둘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나대로 오래 묵은 마음의 먼지들을 털어내었다. 오늘은 한쪽으로만 열렸던 귀를 모두 열고 갇혔던 내 마음의 소리도 듣기로 했다.


차를 타고 지나다 유리창이 뾰족뾰족 깨진 어느 시골집을 만났다. 이 추위에 저 정도 깨진 유리창으론 하루를 나기도 힘들 텐데 하는 걱정도 잠시, 노란 경찰 수사 테이프가 빙 둘러 붙은 것을 보면서 무슨 일일까? 궁금해졌다. 샷시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출입문이 다 깨졌다. 분명 큰일이 있었을 텐데. 저기엔 무슨 시간과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궁금해졌다. 참 이상하다. 나는 누군가의 지나친 관심 속에 사는 것을 싫어하는데, 어느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이토록 좋아하지 않나. 모순이다.


자주 가던 길과 반댓길로 들었다. 어? 산길, 바닷길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도로였는데 뻥 뚫렸던 도로 양 옆으로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는지 공사 중이다. 아무도 빈 땅을 그냥 두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 살아서 빽빽한 아파트 숲에 갇힐 리는 없지만 그 안의 소음도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 때엔 한 시간 거리의 드라이브코스를 찾았고 남해도 알맞은 곳이었는데 이제 마음이 움트고 편히 비빌 땅이 부족해진 것 같다. 집 밖으로 나오니 마음은 들뜨는데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던 것들의 변화 속도가 이토록 빨라지는 것을 보며 세상은 정속으로 가는데 나만 더디게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속도로 갈 테지만.


일부러 고개를 빼고 창밖 더 멀리 본다. 

‘액젖 판매’. 어느 건물 간판 아래에 쓰인 글자였다. 틀린 글자만 보인다. 습관처럼 저거 아닌데 하다가 또 아차, 한다. 남이 잘 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인지 보지 않는 건지, 남의 허물은 잘 보면서 내 허물 들춰지긴 두려워하고, 심지어 내 허물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더 많다. 아니 알고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다는 쪽이 맞는 말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묻은 때가 수월하게 탁탁 털리는 정도의 사람은 되고 싶어서 내 마음 안에서 혼자 싸우는 시간이 길어진다.


한적한 겨울 바다에 섰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도 좋고, 윤슬도 어느 계절보다 예쁘게 빛난다. 아이는 바람이 그렇게 부는 데도 모래놀이를 하겠다고 장화를 신고, 찬 바닷물에 덥석 손을 담근다. 아이에게 몰아치는 바람을 막아주다가 아이보다 내가 더 걱정인 엄마는 아빠에게 슬쩍 그 자리를 양보했다. 혼자 터벅터벅 걷다가 모래밭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을 보았다. 덮이고 덮여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자국들이 이불을 덮고 다음을 기다린다. 세상에 같은 발자국이 하나도 없다. 누군가의 흔적을 그렇게 오래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될 것인가. 종종거리며 누군가의 발자국을 뒤따르기만 할까, 다른 이의 발자국을 제치고 나만의 길을 갈까.

사람 사는 모양이 비슷하다고 여기다가도 나에게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 사고들 앞에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어느 곳에도 똑같은 삶은 없구나,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정말 다른 거구나. 생각한다.



반나절 짧은 나들이를 하면서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주섬주섬 조각글을 모았다. 사람이 늘 밥만 먹고살 수 없듯 항상 같은 자리를 맴돌며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오늘 느꼈다. 내 마음에 창을 연 듯 살랑살랑, 아니 한 김 정도의 바람이 불었다. 좋았다. 다른 어떤 말보다 알맞은 말이다. 종종거리지 말고 조금 느슨하게 나만의 발자국을 만들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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