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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Jul 17. 2021

초록이 주는 위안

내가 좋아하는 하나


딸아이가 종종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한다. 그때마다 엄마는 싫어, 라는 대답을 주곤 하는데 미안하지만 사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싫다기보다 나의 시간과 애정을 쏟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의 상실감이 두려운 것이었다. 어릴 적에 아빠가 사다주신 금붕어 몇 마리를 키웠다. 기껏 먹이를 주고 살 곳을 살펴 준 녀석들은 어느 날 아침 배가 뒤집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어린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최초로 죽음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생명을 키우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가을의 쓸쓸함을 즐기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초록에 마음이 달았다. 식물도 말이 없는 생명인데……. 혹시 내 부주의로 잃어도 미안한 맘이 덜하고 아픔이 덜 할 것 같은 말이 없는 초록이들을 내 집에도 들이고 싶었다.


두 가지만 삽목해 우리집에 온 것이 이렇게 자랐다.


집을 돌보는 일이 곧 나를 돌보는 일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집 전체를 돌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창가 한쪽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많은 아이들이 우리 집 창가에 스쳐갔다. 나는 식물을 키우는 데는 정말 젬병이었다. 모든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빈 화분만 남은 그때, 도련님이 ‘몬스테라 아단소니’를 분양해 주었다. 대단히 번식력이 좋은 녀석이라 들었고, 다행히 우리 집에서 굉장한 성장 속도를 자랑하며 한 번의 분갈이도 마쳤다. ‘아, 나도 뭔가 키울 수 있구나.’ 자신이 생겼을 때 아이에게 유칼립투스 화분을 선물 받았다. 플라스틱 화분에 위태롭게 솟은 아이를 하얀 도자기 화분에 옮기고 그날부터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자기의 선물이니 죽이면 안 된다는 아이의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매일 물을 주라는 꽃집 아주머니의 당부 역시 잊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보였다. 연한 줄기를 타고 잎을 펼치는 식물을 보니 덩달아 나도 자라는 것 같았다. 장마도 아닌데 며칠씩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날 과습으로 잎 뒷면에 수포가 올라와서 망연자실하기도 했고, 몇 번의 고비를 아이 키우듯 마음 졸이며 넘겼다.


검정 포트에 감긴 유칼립투스는 하얀 화분에 옮겨 심었다.


덕분에 매일 눈에 초록의 싱그러움을 담았다. 커피와 책을 끼고 앉아 그것들을 가만 바라보는 즐거움이라니. 그런데 어제 가장 싱싱하다고 생각했고, 목질화 되는 중이었던 유칼립투스의 줄기 한 대가 누런빛을 띠며 쪼그라들어 버렸다. 암만 해도 다시 살아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행여 다른 아이들도 죽을까 겁이 나 그 줄기만 잘라내었다. 아, 순식간에 초록빛을 잃은 화분이라니. 나의 애씀과 애정의 시간을 한 순간에 잃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본 유칼립투스는 싱싱한 초록빛을 일부 잃긴 했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쁘게 자라고 있다. 몬스테라 아단소니는 일주일에 여러 개의 새 잎을 틔우며 혼자서도 잘 자라고 있다.

<아무튼 여름>을 쓴 김신회 작가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서툰 사람이다. 그런 내가 주기적으로 화분에 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하고, 분갈이를 해 주고, 또 잎 한 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 그런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나는 나의 작은 애씀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초등생 여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의 육아 생활에서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긴 하지만, 육아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관심이 강압이나 잔소리가 될 수 있기에. 하지만 식물을 키우는 것은 달랐다. 하루아침에 말라간 유칼립투스를 보면 식물도 내 마음대로 되는 존재는 아닌 것 같지만, 내 관심에 따라 초록의 짙기가 다르게 보이는 건 분명하다.


이사온 후로 햇볕을 더욱 듬뿍 쬔 덕분인지,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창가 자리의 화분 두어 개가 주는 기쁨이 꽤 크다. 식물의 하루하루를 돌보는 것이 나와 우리 가족의 하루가 자라는 것을 보는 일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자 하루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을 때, 어제와 다름없는(사실은 알게 모르게 자란) 초록 이파리들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안정감, 파릇한 색감의 초록이 주는 위안이랄까.



빼꼼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면 우리 집 아단소니와 유칼립투스 줄기가 춤을 춘다. 그것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즐겁다. 시간을 들여 지속하고픈 즐거움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물 주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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