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연필 이야기

사각사각

딸아이 책상을 정리하다가 또 한소리 늘어놓는다. 색연필, 사인펜, 연필 할 것 없이 치워도 또 쉴 틈 없이 꽂힌다. 가득한 연필은 이미 여러 차례 비웠는데 이번에도 만차다. 안 쓰는 건 아까워도 좀 버려~ 엄마 가져간다! 해도 아랑곳 않는 걸 보면 다음번에도 똑같은 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런데 이거 낯익은 연필이다? 언제 가져와서 숨겨두었는지 모르겠다. 하긴 잔소리하는 엄마도  필기구를 좋아해서 부지런히 연필을 사 모으던 때가 있었지. 그래도 예전 같지 않아 미뤄두었다가 맘에 꼭 들어 샀던 일곱 자루. 나무색 매끈한 연필이다. 아껴두었던 연필인데 그중 한 자루가 아이의 연필꽂이에 꽂혀있다. 물론 달라면 한 자루쯤은 군말 없이 줬을 테지만, 앙큼한 녀석.

나는 연필을 아주 좋아한다. 그렇지만 학교 앞에서 주는 연필이나 학습지 선생님이 주고 가는 연필은 싫었다. 연필 한 타는 왜 하나 혹은 둘의 디자인인지. 여러 가지 연필을 골라 내 멋대로 한 타를 만들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것저것 다 예쁜, 내 눈에 연필은 늘 욕심나는 문구류였다. 특별히 브랜드를 따지진 않고 손에 쥐었을 때 느낌과 종이에 한 두어 자 적었을 때 맘에 드는 사각거림 정도면 충분하다. 종이 연필은 어쩐지 보기만 해도 낭만적이지만 연필깎이를 돌리는 맛이 없고 둥근 연필은 쥐는 맛이 없다. 그래서 나는 육각의 B심 나무 연필을 가장 좋아한다. 연필에도 취향이 있다. 그 나무 연필은 나와 딸아이의 취향 일치라고 생각해 두자.

사각사각 연필이 제 살 갉아먹는 소리도 좋아한다. 그럴 일이 많이 줄긴 했지만, 글의 초고도 정말은 연필로 써야 제 맛이다. 뭐랄까, 연필로 쓴 것들은 미완의 멋이 있다. 굳이 지우개로 지우지 않아도 두어줄 슥슥 그어버리면 그것대로 전후의 공백 없이 맛깔 난다. 쓰다가 지운 부분이 읽으면서 다시 맘에 들면 동그랗게 말아 살리면 그만이다.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것인지 연필로 무언가 쓰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연필로 쓴 무언가의 흔적을 좋아하는 것인지의 경계를 짓긴 힘들지만 그 사이에 연필이라는 매개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학교 다닐 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공책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으며, 그렇게 한참 쓰다 보면 공책에 닿은 오른손 날이 새까맣게 글자를 품고 있던 기억이 난다. 날카로운 샤프가 가진 낯선 느낌보다 뾰족할 때는 예쁜 글씨가 돋보이고 뭉툭할 때는 그런대로 내 온기가 닿던 연필의 흔적이 좋았다. 중학교 때에는 수학은 싫은데 수학 시간에만 연필을 쓸 수 있어 그 시간이 좋았다. 연필로 썼는지 풀었는지 모를 수학 문제 앞에서 그냥 좋았다.

지금도 어느 곳에 갔을 때, 그 낯선 곳에서 나는 연필을 들었다 놨다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 맘에 드는 기념품이기 때문이다. 아끼느라 언제 쓸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낯선 가운데 익숙함이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엄지손가락이 연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연필을 보면 반갑고, 몇 글자 끄적여 보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나를 대신해 자기 색을 뿜을 아이들의 연필 흔적을 기다리며, 아쉬우나마 연필을 한 번 쥐어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