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페스트>는 서술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서술자는 자신의 임무를 ‘그런’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런 사건이란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에 느닷없이 찾아온 페스트가, 실제로 그곳 사람들의 삶에 깊이 관여한 일을 가리키며, 그의 임무는 그 도시에서 사건을 함께 겪어 마음으로 진실을 알아줄 수천 명의 증인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서술자 스스로, 혹은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말을 빌어 보면 페스트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다. 그것은 재앙이며 죽음, 이겨야 하는 경기, 귀양살이이자 이별, 살다보면 생기는 일이다. 페스트는 신중하고 흠이 없는 그래서 너무나 잘 작동하는 하나의 체제다.
페스트라는 재앙 앞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이다. 페스트로 인한 죽음과 죽음의 공포는 물론이거니와, 이외에 가장 시민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알지 못하는 어떤 죄악이 가져온 격리와 감금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한 것, 이별로 인한 개인들의 슬픔이 질병 자체의 공포와 함께 고통이 된 것이다. 시민들의 고통은 그들 자신의 고통과 우리를 잃은 자식들, 아내 혹은 연인을 상상할 때의 고통까지 더해져 배가 된다. 그들이 겪는 극단적인 고독 속에서 누구도 이웃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각자 자기만의 걱정거리를 안고 홀로 있다. 그들은 상처만을 주고 받는다.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이 고통으로 인해 행정당국을 비난하고,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그래서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이 비현실이라 믿고 있는 페스트라는 불행은 그들을 현실에서 죽이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비현실적인 불행일 수 없다. 곧 페스트는 사실상 실체로서, 모든 사람이 관련된 문제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시민들은 페스트가 만든 질서 속에 들어가 별 도리 없이 그에 보조를 맞춰 적응해갔다. 덕분에 그들은 그들에게 던져진 불행과 고통에 익숙해 졌고 미래가 없는 인내와 좌절된 기다림으로 남아있었다.
리외는 의사이자 페스트 직후, 이를 대처하는 시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 사건에 깊숙이 결합하는 인물이다. 그는 페스트의 진짜 문제는 문제해결을 위해 규정된 법률과 조치의 가혹성 여부가 아니라 죽음을 막기 위해 그 규정이 필요한지 여부를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시간의 문제임을 알고 바로 조치하는 것이라 말한다. 리외는 자신의 역할을 진단하는 일로 정의한다. 페스트를 발견하고, 보고, 묘사하고, 등록하고, 그 다음에 선고를 내리는 것. 처음에 그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일한다고 믿었으나 곧 그 자신이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 거기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리외는 불행과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절망 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여겼고, 때문에 절망의 순간 아내를 잊지 않기를 다짐하고, 랑베르가 도시를 탈출하는 것을 지지한다. 그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도의’뿐이라 말하며 신이 없는 듯 어두운 이 시대에 성자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 고민의 끝에 그는 그저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말한다. 그런 3부의 리외는 4부에 이르러 성자가 되려면 살아야 한다고 그러려면 싸워야 한다고 죽음을 앞둔 타루에게 말한다.
타루는 전염병은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자원보건대를 조직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선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데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타루는 결국 페스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선명한 언어에 대한 요구는 저자 까뮈 내면의 고민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는 리외에게 영향을 끼친다.
랑베르는 알제리에 취재하러 온 기자다. 그는 인간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므로 영웅이 되려 하지 말고 전체의 해방을 기다리자고 말하는 자다. 그런 그가 오랑에 남기로 한다. 그는 두고 온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떳떳하기 위해 남겠다 한다. 실은 자신이 오랑이라는 도시의 이방인이고, 이곳과 아무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보고 겪은 고로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이 이곳의 사람이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이 일은 우리 모두와 관계된 것이므로 떠날 수 없다 말한다.
파늘루 신부는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있을 때 반항심이 생기는 거라 지적하는 사람이다. 신자들에게 반항심을 거두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설교하지만 어린 소녀의 죽음을 겪으며 그의 설교의 주어는 ‘여러분’에서 ‘우리’로 변화한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영혼의 안식만을 염원할 수 없고 다만 불행 속의 선의를 구해야 한다. 이 불행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굴복하고 복종한다. 신부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이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이 힘겨운 사랑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사랑의 말을 실천한다.
소설 <페스트> 속의 인물들은 각자의 페스트를 겪고 동시에 이것이 모두의 페스트임을 고백한다. 각 각의 인물은 마치 까뮈 안에서 충돌하는 각각의 사유같다.
페스트가 절정에 치닫고 치세는 곧 자자든다. 그 사이 시민들 마음속의 희망은 늙어버렸다. 리외는 "오직 페스트를 겪었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우정을 겪었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정을 체험했고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페스트와 같은 삶과의 경기에서 얻을 수 있은 전부는 "경험과 기억"이라고 말하면서, 때문에 타루의 죽음은 이러한 측면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죽었지만 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오랜 유배가 끝나 관문들이 열리고, 서술자는 그 기쁨의 시간 역시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 기쁨에 완전히 섞일 자유가 없는 것 같다. 관문이 열리고, 시민들은 변해버린 시간, 사랑을 잃어버린 채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오랑의 낮은 정지된 듯하고 사람들은 광장에서 춤을 춘다. 그들은 담담한 태도로 미묘한 기쁨을 가린 채, 자신들이 아픔을 겪은 장소들을, 페스트의 흔적과 그 역사의 잔해를 순례한다. 시민들은 안내자이자 많은 것을 본 사람으로 페스트 시대를 살아내었다는 만족함이 그들 안에 흐른다. 그들은 그때의 공포감은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당시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들은 그 시절에 간절했던 당신이 거기에 없었다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고향이란 자유로운 고장과 사랑의 무게이므로, 그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모두에게 진정한 고향은 오랑 자체이기보다 이 시의 담 너머일지 모르겠다.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의 부족하고 지독한 사랑만으로 족한 이들에게 가끔은 기쁨이 보답하러 와야 옳다고 서술자는 이들을 위로한다.
페스트의 시대에 그곳에는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의미를 잃고 페스트라는 집단적 역사와 모두가 공유하는 여러 가지 감정만이 존재했다. 5부에 이르러 서술자는 자신이 리외임을 밝히는데, 그는 자신이 객관적 증인의 어조로 이 시대를 기록하고자 했음을 밝히고, 스스로 그 태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한다.
페스트가 지배하던 시대에, 그는 직업상 대부분의 시민들을 볼 수 있어서 그들의 감정을 수집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고, 따라서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하기에 좋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기록했다. 그는 기록의 와중에 페스트를 함께 겪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가하지 않고자했고, 다만 그의 손에 우연히 또는 불행히 오게 된 글들만을 사용하여 기록을 보완한다. 때문에 리외 자신은 마치 등장인물로서 모든 기록에 그저 "등장"한다. 그가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기록했다는 의미는 반대로 무엇을 기록하고자 한다면 그런 위치에 처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종의 범죄에 대해 증언을 하려고, 선의의 증인이 되려고, 의로운 마음의 법칙에 따라 단호하게 희생자의 편을 들었고 사람들,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 그곳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감정이었던 사랑과 고통, 시민들의 시름을 공유하고자한 그는 그들의 상황이 결국은 곧 자신의 상황이므로, 이 기록의 주체가 자신이어도 좋음을, 기록자로서의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사랑했고 상실했고 죄를 짓고 죽으며 결국은 잊힌다는 공통된 사실이 오랑의 시민이 리외 자신으로 자기화된다.
서술자인 리외는 자신이 대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페스트의 시대에 아이들과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마음으로 찬동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용서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말이다. 만일 우리가 이 연대기의 무정한 마음에 대해 대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사실채로, 그 사실 그대로 끝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기록할 수 없는 것, 차마 기록하기 어려운 살벌한 사실과 감정에 대해서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기록자의 태도여야 함을 지적한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 이 연대기가 최후의 승리의 연대기 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모든 사람이 개인적 아픔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맞서 그리고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맞서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지 승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고.
질병이 자자들어 겪은 우리의 기쁨과 환희는 늘 위협받는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므로. 수십 년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묵혀둔 죄들을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에 다시 보낼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다시 죽음이 온 도시를 뒤엎을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소설에서의 표현과 다르게 불행은 딱히 계획과 의도가 없는 것 같다. 불행은 그저 이유 없이 방문하고 이내 사라진다. 페스트의 시대에 자신은 이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소설의 표현 그대로
“페스트 환자로 있어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있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더 피곤한 일이다. 그것은 약간은 모두 페스트에 걸려있고, 죽음 외에는 그것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므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진해서 피로를 겪는 일”
때문에 리외는 찾아 온 불행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되, 불행과 고통에 익숙해지지는 말아야 하며, 오직 살아남는 것, 싸우는 것, 그리고 그 살아남음으로서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