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인터스텔라(2014)>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제작 <인터스텔라(2014)>의 지구는 황폐하다. 기상이변으로 흙먼지가 온땅을 메워서 숨을 쉬는 것도 어렵다. 해를 가리고 모래바람이 불어 척박한 땅은 겨우 옥수수만을 생산해 낼 뿐이다. 식량이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라 인류의 미래는 뻔하다. 전직 우주비행사 쿠퍼는 장인어른과 큰아들 톰, 작은 딸 머피와 산다. 그들 가족은 옥수수 농장을 운영하는데 농장을 운영하는 쿠퍼의 눈은 땅을 향해있지 않고 늘 상 하늘을 향해있다. 그의 초점을 알 수 없는 눈빛은 그가 단순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과거에 속했으나 다시 갈 수 없으리라는 것, 하지만 자신이 속할 곳은 언제나 그 곳이라는 미래에 대한 간절함이 그 초점 잃은 눈 속에 보인다. 그러던 중 쿠퍼와 그의 딸 머피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해석하다 사라진 줄 알았던 미항공우주국을 찾게 된다. 그들은 인류가 이주할 새로운 행성을 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딸 머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쿠퍼는 그의 눈이 간절하게 쫓던 우주로 향한다. 그것은 그의 가족과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머피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새 행성을 찾기 위해 먼저 파견된 동료들이 보낸 신호를 쫓아 쿠퍼 일행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시간의 속도가 다른 우주에서 그들은 중력과 시간을 다투며 어떻게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만 인간들이 있는 곳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짓과 욕망이 그들의 미래를 뒤틀어버린다.
볼 사람은 다 봤을 것이므로(천만이 넘게 보았다는 것 같으니)영화의 결말을 공개하면 해피엔드라 할 수 있다. 곧 죽을 위기에 처했던 지구는 재생에 성공했고 지구와 같은 대기권을 갖춘 새 행성도 찾았다.(앤 헤서웨이가 분한 브랜드 박사가 그의 연인의 무덤 곁에 앉아 숨 쉬던 장면을 기억한다면) 쿠퍼가 블랙홀에서 구조되어 머무르고 있는 우주정거장은 그간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늙은 딸은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고 젊은 아버지는 딸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지구의 멸망도 인류의 멸종도 막아내었고 선택받은 인간들은 블랙홀의 신비를 풀고 그들의 힘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해내었다. 이 어마어마한 해피엔드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내내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세상의 끝을 극복한 인류를 보고도 딱히 기쁘지 않은 이 석연치 않은 기분은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딸 머피는 왜 자기 이름을 머피라 지었느냐 아버지에게 따진다. 머피의 법칙의 머피라니 그래서 자신이 운이 없는 거라며 툴툴댄다. 쿠퍼는 머피의 법칙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고 답한다. 쿠퍼의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지구의 종말 앞에 그 종말을 불식하고 해결할 키가 머피와 쿠퍼에게 있음을, 그래서 그들에게 일어날 일들 이를테면 그들이 초자연적인 게시에 이끌려 결국엔 우주로 향하고 우주 가운데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구할 해답을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 말이다. 쿠퍼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는 존재들이 그들을 우주로 이끌었고 그 주체가 존재함을 끊임없이 전제한다. 그리고 그 힘이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해결의 열쇠를 전하는 순간 그들을 이끌어낸 힘도 그 열쇠에 감추인 비밀을 풀어내는 힘도 결국엔 자기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 자신이 그 힘 자체임을 고백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몸이 움찔했다.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자체인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그 힘 자체도 그 힘을 이끌어내는 주체도 인간과 그들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 말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들, ‘신’을 믿는 자들에게 운명과 예정은 익숙한 개념이다.(특히 기독교라면 더욱이) 신의 뜻이 있고 그 뜻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그 운명과 예정이 지칭하는 일어날 ‘일’이란 어떤 ‘사건’의 예정 이라기보다는 어떤 ‘방향’의 예정을 의미한다. 종말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 어떤 예정된 ‘사건’에 의한 우연한 결과로써의 ‘구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이라는 방향으로서 예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방식과 무관하게 그 결과에 이르도록 인간을 이끌어낸다는 의미다. 하지만 구원의 주체가 그들 자신이 될 때에 ‘일’은 ‘방향’이 아니라 ‘사건’이자 ‘결과’가 되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힘과 존재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며 신을 긍정하던 영화는 갑자기 신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인간과 그들의 의지를 끼워넣는다.(사실 영화를 보고나면 그것은 이미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터스텔라>에는 사랑이, 그것도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동료와 연인에 대한 사랑, 가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끊임없이 언급된다하지만 수많은 언급 속에서도 관객이 그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쿠퍼와 브랜드 박사가 탄 우주선의 연료는 제한적이다. 그들에게 남은 연료로는 남아있는 두 행성 중 한 행성을 선택해서 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선택지는 명확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행성과 신호가 간헐적이어서 믿을 수 없지만 브랜드 박사의 연인이 있는 행성, 이렇게 두 곳이다. 브랜드 박사는 사랑을 택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전 행성에서 겪은 실패로 박사는 이성보다는 사랑을 믿는 것이 방법인 것 같다고 연인이 있는 행성에 가자고 애원한다. 그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성적으로 확실한 신호를 보내는 행성으로 향하는데 막상가보니 그 신호는 거짓이었고 덕분에 또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 밝혀지지만 브랜드 박사가 ‘사랑’이라고 말한 그 행성은 미래의 지구가 될 적합한 땅이다. 이 단순한 구조가 불편했다. 사랑이 마치 하나의 개념인 것처럼, 이성과 욕망의 반대말인 것처럼, 몹시 유치하게도 연인이 있는 곳은 사랑의 땅이 되어 지구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는 설정을 받아들여도 좋은지 모르겠더라.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 같겠지만 그 덕에 너희는 또 다른 개인의 이성과 욕망으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협, 이 1차원적인 메시지를 <메멘토>, <인썸니아>, <배트맨> 시리즈물에 <인셉션>까진 만든 놀란 감독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이런 끝없는 사랑타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뱉어내는 사랑이라는 언어로부터 사랑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인류의 미래란 결국 자기 자녀들의 미래다. 쿠퍼는 톰과 머피를 위해 우주로 간다. 이미 그의 눈은 끊임없이 우주를 향해있었는데도 그의 입술은 톰과 머피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주에 간다고 말한다. 그렇게 쿠퍼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인류애와 부정(父情)이 넘치고 직관과 판단력이 훌륭한 인물로 비춰진다. 그의 부정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억지스러워 보는 것은 나하나 뿐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우주를 향한 것을 오로지 사랑에 근거해 해석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다. 쿠퍼는 자신이 우주에 속한 것에, 머피는 그 우주의 신비를 푼 것에 그들의 삶의 이유를 두고 있다. 그들의 힘으로 블랙홀의 비밀을 풀고 인류를 구원한 늙은 머피와 젊은 쿠퍼의 만남,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그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는 선택받은 인간들의 영웅적인 응원으로 느껴진다. 지구도 인류도 구원받았지만 그 기쁨은 마치 둘 사이의 정서처럼 내게는 몹시도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들 삶의 완성은 부녀지간의 사랑의 완성에 있지 않고 그들 각자의 성취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때문에 구원받은 세상의 이미지는 사랑 없는 황량한 공간에 불과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는 일어날 ‘일’이란 결국 인간들의 의지와 스스로를 이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사건이다. 때문에 그들 세계에 신은 없다. 기이한 것은 세상 끝에서 구원받은 지구가 내게는 이미 끝나버린 세상으로 읽힌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인간들이 그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우주의 신비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간주될 때, 내게는 그간의 감추어졌던 생의 내밀한 섭리와 삶을 지탱해주던 그 세심한 힘들이 의미를 잃고 시시해져 버린다. 인간들이 몹시도 진지하게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 우리 자신이 곧 우리를 이끄는 섭리 자체라는 통찰을 던지는 것이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세상의 끝’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인류라는 종으로 지구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믿음이 나는 없다.
사실 그럼에도 쿠퍼를 연기한 매튜 매커너이의 연기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큼 훌륭했다. 어느 기사에서 보니 완벽하게 노력하지 않은 영화를 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놀란의 연출은(극본도 그가 쓴 건지 잘 모르겠다만) 영화가 일군 물리적 성취와는 별개로 그다지 완벽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세상은 신이 없는 것처럼, 누구도 심판받지 않을 것처럼 돌아간다. 이 신이 없이 구는 세상 속에서 이토록 거대한 스크린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해주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더 서글픈 것은 그 영화를 보고 느낀 불편함의 이유를 한참 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나에게 세상의 끝은 신이 없다는 가정 자체였다. 신이 없는 세상을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에 자신이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영화에 공포를 느꼈다. 멀쩡한 영화를 보고 이렇게 허무맹랑한 설명을 하게 된 것이 좀 민망하지만, 나는 그런 세상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