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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즐겁게 해줄 불편한 영화들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제타> 그리고 <자전거 탄 소년>

by 영롱

왜 당신은 영화를 보는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나는 불편한 영화들이 좋더라. ‘불편함’이라니 이렇게 주관적인 표현을 영화에 끌어와도 될까 싶지만 그런 개인의 불편함을 끌어내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라고 믿고 있다. 각자의 불편함을 끌어내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가능하면 그 불편함이 어찌되면 해소될지를 고민해 보는 것, 해소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부채를 같이 짊어지는 것.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물론 사는 게 이미 고달프다 보니 점점 가볍고 신나는 영화들을 더 많이 찾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ㅋ


무엇이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가. 불편한 것도 다 각각이라 각자의 불편함이 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지점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또 사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해도 인간이라서 상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있다. 모두의 불편함을 다 담아낼 수는 없으니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을 먼저 풀어봐야겠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쓰고 보니 꽤 추상적이지만 나에게는 꽤 확실하게 와 닿는 실체가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단순하지 않은 것,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 않는 것들.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 선악이 불분명해서 구별이 힘든 것.

어떤 측면에서든 결핍의 상태에 놓이는 것.

영원하다고 믿는 것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숨기려던 비밀이 드러나는 것.

세상과 기준이 달라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 그래서 외로운 것.

선함이 오만함으로 전복되는 것.

균형이 깨진 것.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결국엔 자유하지 못한 것,

나를 어딘가 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


이 불편하고 거슬리는 감정을 좀 더 풀어보면 이렇다.


“나를 매이게 하는 모든 것” 예를 들면 “가족”, 가족은 나에게 힘이 되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인 동시에 나의 결핍의 원천이요, 나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오로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진, 나를 매이게 하는 것. 이런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세상으로 끌어낸 많은 작품들이 있다.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예를 들면 내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가는 타인의 불편함들. 그 폭력의 형태가 너무도 다양하여 폭력인지 알아채지 못해서 더 불편한 세상의 진실들도 영화에 담겨있더라. 그런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멋대로 생각해서 떠들어보려고 나는 영화를 본다.


부활절을 위한 영화

이제 다음주면 고난주간이고 고난의 끝에 부활한 예수를 기념하는 부활절이 온다. 2004년 개봉이래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부활절 단골 영화다. 이를 제외하고 나면 예수의 수난의 비극과 수난의 전복,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제 부활절에 이 영화를 보는 건 정말이지 싫다. ㅜ 그래서 추천하는 2편의 영화. 모두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인데 1999년작인 <로제타>와 2011년작인 <자전거 탄 소년>이다.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통해 수난과 수난의 극복을 얘기해 보자.


영화<로제타>, 로제타가 아주 잠시 동안 행복을 느꼈던 순간일지도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인 <로제타(1999)>는 나에게 가장 불편한 영화이자 가장 보물 같은 영화이다. 이게 바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구나’각인된 작품이랄까. 제일 처음 본 작품은 <아들(2002)>이었는데 그 불편함이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로제타>에 대한 연민이 나에게는 더 컸다. 어린 소녀 로제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태도에 굴하지 않아야 하고, 허기짐과 차갑고 시린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어린 소녀. ‘소녀’로의 삶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가엾다는 말도 민망한 소녀의 삶. 채찍이 없는 수난이 거기에 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부활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더 무겁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운 어린 소녀의 삶.


감독의 카메라는 로제타와 딱 붙어서 숨을 헐떡이고 분주하게 흔들린다. 그런 감독의 시선은 로제타와 함께 하면서 로제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소녀의 삶을 위해 관객이 해줄 것 역시 그것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시리고 아픈 배에 헤어드라이어의 작은 온기를 가져다 대므로 스스로를 보살핀다. 로제타는 지나간 아팠던 과거도 아니고 추억의 회상도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로제타는 나 자신일 수도 있으며, 그를 냉대하는 시선이 나로부터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수난이란 끊을 수 없는 결핍의 고리이며, 이 땅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고단한 삶이다. 그녀의 수난은 자신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은 그저 주어진 자신의 생이다. 그 사실이 다시금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삶의 수난이다.


영화 <자전거 탄 소년>, 소년의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먹먹하다


다르덴 형제의 나름 최근작 <자전거 탄 소년(2011)>은 평소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매우 다른 따뜻한 영화다.

(다른덴 형제의 영화들은 대부분 건조하다. 현장의 소리가 있는 그대로 담기며 카메라를 쥐고 주인공을 따라가는 방식의 영상은 거칠기 그지 없다. 하지만 <자전거 탄 소년>은 달랐다.) 시릴이라는 소년을 끊임없이 믿어주는 사만다라는 여성을 통해 시릴의 삶이 새로운 ‘집(가정)’을 얻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초기의 다르덴 감독의 영화가 수난가운데 버려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그 수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따라다녔다면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사만다라는 이웃을 통해 구원받는다.


부활의 기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다, 또는 다시 태어남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다는 ‘나의 집, 본래 내가 속한 곳, 내가 돌아가야 할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이지 않을까 싶다. 기독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미래는 이 땅에서 그곳에서 사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다 결국에는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가정이란 그런 본향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생육적으로 맺어진 가족의 의미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정이 되어주는 약속, 그 약속을 지켜내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시릴의 아빠는 아들을 낳았지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았다. 사만다는 시릴을 낳지도 기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시릴을 만난 순간부터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돌보고 돌아갈 곳이 되어 주었다.


우리의 수난은 돌아갈 곳, 의지할 곳이 있을 때에 구원받는다. 가여운 로제타의 수난은 세상 밖의 감독의 시선 외에는 어떤 위로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오로지 헤어드라이어의 온기만이 세상 속에서 그녀가 가진 모든 위안이다, 그 위안이 너무도 작고 볼품없어서 마음이 아리고 슬펐다. 처절하게 가족에게서 가정을 요구하는 시릴은 사만다라는 쉴 곳을 얻으므로 구원받는다. 쉴 곳, 돌아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린 소년에게 쉴 곳이 되어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소년의 부활을 이루었다.


영화<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과 사만다


불편한 지점에서 생각은 시작된다. 거기로부터 좋은 질문이 나오고, 좋은 질문으로부터 해답이 나온다. 제대로 된 질문은 언제나 해답을 갖고 있으니, 영화라는 완전하고 멋진 질문에서 나름의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은 즐거웁고 즐거웁다. 정답보다는 각자가 갖게되는 나름의 해답이 또 우리를 건져줄 것이다. 영화를 대하고 그로부터 풀어낸 나름의 해답은 이왕지사 불편한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불편함이라는 응축된 균을 미리 맞아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미리 정비하게 해주고 좀 더 제대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해주는 것, 그래서 조금은 안심(安心)하게 된다.


불편함은 그러니까 불편해서 쓸모가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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