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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y 24. 2017

분리로 부터

이연주 연출, <2017 이반검열>

출처 : 남산예술센터


나라의 수장이 결정되었다. 연일 대선주자들의 토론이 이어지던 당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건, 단연 성소수자들과 여성 등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한 주자들의 태도와 언어였다. 통치가 통치권을 위임받은 자의 언어로써 이루어진다고 볼 때, 그의 태도와 그 태도가 뭍어난 언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의 언어가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분리와 소외의 언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이반검열>은 소수자를 소수자로 이름짓고 이를 검열하는 권력에 대한 연극이다. 지난 권력이 행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라는 검열과 차별에 맞서 연극인들이 주도했던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의 참여작품 중 하나로, 4월 다시 무대에 올랐다. 청소년, 성소수자, 세월호 생존자와 형제자매,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이주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이반검열>은 416을 앞두고 무대에 올라 더 의미가 있다.


이반(二般, 异般)이란 일반(一般)으로 부터 나온 말이다. 일반적인 것, 일반인, 정상인이라는 범주에 반하는 말, 다수에 반대되는 말. 그것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청소년들을 단지 과도기적 상태로 보고 그들이 해야하는 말과 행동을 규정하는 말이며, 이성애자를 정상이라 한다. 상상도 하기 어려운 참사를 겪었어도 시간이 흘렀으니, 나는 이미 잊었으니 그것이 어떠한 슬픔이든 너도 이제 남들처럼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폭력의 말이며, 다수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존엄따위는 쉽게 의심되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자국민의 것이므로 존중받을 생각은 버리라는 위협의 말이다.


출처 : 남산예술센터


검열은 일반과 그 외의 것을 구분짓는 권력이 그 구분을 유효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검열은 외부자가 나 자신보다 앞서 나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대신 판단하고 이름짓는다. 그것은 일반이거나 이반이다. 이반인 나는 이반이므로 분리된다. 분리된 나는 당연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다. 정체성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므로 영원히 이반일 수 밖에 없는 나의 세계는 폭력이라는 일상을 산다. 검열은 이반을 일반으로 부터 떼어내는 역할을 한다. 분리된 이반은 차별해도 좋은 대상이 된다.


무대 위에는 다양한 색의 의상을 입은 청소년이, 청소년 성소수자가,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청소년이, 그리고 그렇게 성인이 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이 겪은 시선과 경험과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그 일상적인 폭력을 덤덤하게 전한다. 그들의 학교와 가정에서,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때, 그 부정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도 용인되지 않을 때의 그들의 감정을 담담하게 말한다. 그들을 대하는 미디어는 아이러니 하게도  모두 차별없이 폭력적이다. 폭력적이라 함은 그들의 이야기에 그들의 언어는 없고 일반이라는 틀을 가진 미디어의 시각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눈에 비친 이반은 일탈이며 비정상이며 선도되고 교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출처 : 남산예술센터


연극은 소수자들의 언어, 미디어의 언어를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한다. 동시에 배우들의 몸을 통해 그들의 생각과 언어와는 별개로 통제되고 억압된 몸은 지시와 명령에 따라 행진하고 군무를 추며 분열을 이룬다. 연극은 연극에 사용한 구술과 영상의 발췌 목록을 모든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연극에 사용한 말과 영상이 새롭게 쓰여지거나 촬영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를 당한 이들의 구술, 미디어 속의 말들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우리 안에서 실재하는 언어이며, 그 언어와 미디어 간의 차이를 통해 이것이 진정 우리의 언어인지, 조작된 언어인지, 언어의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한다.


왜 분리되어야 하는가. 분리하는 주체는 누군인가. 분리하는 권력은 분리되지 않은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척한다. 그래서 그들이 안전하다고 당신들은 일반이고 정상이므로 정죄하고 판단할 주체라고 말하는 그들의 미혹은, 실상은 판단대상이 되어야 할 권력 자체를 주체로 만들고 판단의 주체인 시민을 판단대상으로 오인하게 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다수의 이익, 힘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들의 권력을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자의 언어로 우리의 언어를 지운다.


과연, 나는 일반의 범주인가, 그래서 안전한가라고 묻는다면 어떤가. 세월호 침몰이라는 참사를 겪으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수인 줄 알았던, 평범해서 안전할 줄 알았던 삶의 기준들이 무너졌다. 자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구하지 않는 정부를 맞닥드릴 수 있고,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을 수도, 집을 잃을 수도 있다. 대기업이 생산한 제품으로 또는 그들의 일터가 나와 가족의 생명을 저당 잡을 수 있고,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법은 더 힘있는 자에 편에 설 수 있다. 언제든 모두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소수자가 되는 일이 이토록 가까운 것이라면, 서로 다른 이유로 모두가 소수자라면, 더이상 다수라는 이름으로 일반이라는 이름으로 검열하고 차별하게 두어서는 안되지 않은가 자문한다.


나의 문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다가 너무 늦어버릴까 겁난다. 이런 감수성과 언어를 지닌 자들이 권력을 쥐도록, 또 그 권력이 작동할 수 있도록 지지대를 갖출 준비를 해야지 싶다. 검열의 역사, 소수자를 대하는 권력의 역사가 이제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싶다. 연극은 이렇게 한발 앞으로 나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출처 :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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