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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Apr 08. 2016

잃어버릴 수 없는 당신의 반쪽

최철 연출, <반도체 소녀>


출처 : 플레이디비


노동자勞動者 또는 근로자勤勞者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념도 끼어들 수 없다. 노동자, 근로자가 상품으로 내놓는 것은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육체가 행하는 힘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느 사이 우리의 육체를 담보로, 생명을 담보로 대가를 취하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2010년 초연된 <반도체 소녀>는 새로운 변화를 덧입고 2014년 시월부터 한 달 간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공연됐다. 초연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물들의 면면.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한 소녀의 모습은, 피해를 당해 떠돌던 가여운 영혼에서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며, 그들을 위로하고 자신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강한 노동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정민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죽어가는 소녀를 돌보는 호스피스다. 소녀의 죽음 앞에 정민은 마음을 달래가며 잊으려 애쓰지만 쉽게 잊을 수 없어 괴로워한다. ‘또 하나의 가족, 밤성’의 서비스센터 기사로 일하는 동영은 그녀의 남자친구다. 형편 때문에 결혼을 미루며 같이 살던 어느 날 정민의 임신 소식에 결혼을 더 이상 미루지 않으려 애쓴다. 정민의 동생 세운은 대기업 입사가 꿈이나 번번이 실패한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순응하겠다고 다짐하고 외쳐 봐도 취업이 쉽지 않다. 학습지 교사 일을 하다 부당해고를 당한 연인 혜영은 그를 위로하지만 부당해고를 당한 자신도, 노력하지만 세상의 논리에 수용되지 못하는 세운의 처지도 서글프다. 더 이상 서글픈 처지만을 탓할 수 없어 거리로 나온 혜영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일을 그만 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들 앞에 일상을 무너트리는 일이 벌어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앞에 사람들은 울고 분노하며 절망한다. 그들의 울음과 분노와 절망은 극을 보는 누구의 것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가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듯, 정민은 소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너무 억울해 마,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대. 그러니 억울해 마!


선량한 사람들의 위로. 제때에 가지 못하는 억울함마저 억울해할 수 없는 세상,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억울해할 기회마저 가져가 버리는 사회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문제를 하나로 묶이지 못하도록, 개인의 슬픔으로, 개인의 아픔으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켜 개인이 그 몫을 감당하도록 분리시킨다. 작고 힘없는 개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억울해하지도 못한채 슬픔은 배가 된다. 연극이 끝나갈 때 소녀의 아픔은 정민의 아픔과 나란해진다. 다만 살아서 존중받고 싶었던 소녀의 죽음은 이제 정민의 삶의 무게가 된다.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오로지 입으로만 격려하며, 개인의 수고로움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익 불리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에 의해, 정민은 동영을 잃는다. 그렇게 조금 더 고생하다 병을 얻어 죽어버리면,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생명에 대해서도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면, 그들은 위로는커녕 죽음 외에는 손에 쥘 것 없이 세상에 남겨진다. 남겨진 자들은 그 텅 빈 생명과 삶의 무게를 홀로 견딜 수밖에 없다.


노교수는 제자 세운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다. 대기업에 가서 잘 먹고 잘사는 것 외에는 딱히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 세운을 통해 우리에게 꿈이란 한낱 연봉이 되어버린 현실을 상기시킨다. 더 이상 꿈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되어버렸다. 꿈이라는 질문이 너무도 생소하여 우리가 잊고 지낸, 그리고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더 늦기 전에 되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반문하게 한다.


잃을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는 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들을 측은해할 줄도 모르게 되어버린 처연한 시대 정신이 <반도체 소녀>에 있다. 착취와 착취라는 야만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상을 파고든다. 착취와 야만이 필연적인 것으로 용인 될 때, 그렇게 믿어버릴 때, 자본과 경제의 논리는 노동을 제공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인권보장과 생명보호에 대한 협의의 의지마저 잃게 된다.


반도체 소녀는 이름이 없다. 그 소녀의 이름 없음은 그 소녀의 이름이 바로 정민의 이름이고 동영의 이름이고 세운과 혜영의 이름이기 때문이며, 그 연극 무대를 마주한 우리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언제 희생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보통의 우리의 모습이 있다.


매년 새해를 맞으며 진정으로 ‘서로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더 잃어버릴 영혼도 이제 우리에겐 없으므로 기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 2014년 주간기독교 문화짚어내기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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