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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Sep 27. 2017

봄날은 간다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하여 나이와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원로라 칭한다. 한 분야에서 원로가 된다는건 영예로우면서 동시에 조금은 쓸쓸한 일일 것 같다. 이제 가을이니,지난 여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난 7월에서 8월 사이 원로 연극인 4명의 업적을 기리는 ‘늘푸른연극제’가 개최되었다. 올해로 2회가 되는 연극제는 2016년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한국연극계의 원로 극작가와 연출가 4인 김정옥(연출), 오태석(연출), 천승세(극작), 하유상(극작) 선생의대표작을 선보였다. 올해는 배우 오현경과 이호재, 연출가김도훈, 극작가 노경식 선생의 대표작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제의 첫 작품은 오현경 선생의 대표작인 연극<봄날>. 이강백 선생이 1984년에 발표한 희곡<봄날>을 초연 때부터 오현경 선생과 백수광부(이성열 연출)가 함께해 왔다.


나른한 봄날 다 해어진 옷을 입은 청년들이 집 앞뜰에 늘어져서 먼산보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연신 배고픔을 호소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꼼짝 않고는 구렁이를 삶아 먹자는 둥, 입으로만 떠들며 늘어져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배를 곯리며 일만 시키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틈만 나면 늘어질 궁리 뿐이다. 각기 다른 어미에게서 난 아들 일곱은 제 어미들이 인색한 아버지의 타박을 못 견뎌 더러는 죽고 더러는 집을 나갔음을 안다. 아비는 젊은 것들이 일할 생각은 안하고 먹을 것만 축내는 것이 여간 탐탁하지 않다. 건너편 산에 불이 붙어 백운사의 중들이 산을 떠난다. 떠나며 동네에서 개중에 살만 한 아비의 집에 동녀童女를 맡긴다.


처음에는 쓸모 없는 여자아이를 떠맡는 것을 질색하던 아비는 아이가 제법 큰 처녀임을 알고는, 동네 무녀의 조언대로 아이를 품어 회춘하려 한다. 그가 늙지 않으려 하자 아들들은 겁을 먹는다. 아비가 더 늙으면 그들에게 땅도, 집도 물려주고 장가도 들여줄 거라 기대하며, 아비 늙기 만을 기다리던 아들들은, 그것이 기약 없는 것이 될 것 같아 아비를 꾀이고 속여 재산을 빼돌려 달아난다. 아비 곁에는 이제 아비를 가여워 하며 그를 돌보는 맏이와 병약한 막내, 그리고 막내의 처가 된 동녀만이 있다. 아비는 이제 더 늙었고 기력이 없다. 그는 자신의 늙지않으려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렇게 떠나 보낸 아들들이 그리워 그저 방안에서 먼 곳을 보고 앉았다.



연극은 한 편의 그림 같기도 하고, 시詩 같기도 하다. 마치 늙음을 상징하는 듯 온통 석양빛으로 물든 무대의 색감과 젊지만 의욕없이 늘어져서는 저들 끼리 낄낄거리는 나른한 자식들이 부르는 노래와 봄을 이야기 하는 시어들이 꼭 그러하다. 산을 온통 불태운 불의 빛깔이 그러하고, 느릿느릿해서 대사인지 노래인지 모르겠는 말들이 또 그러하다.


연극<봄날>의 아비와 아들들은 권력관계가 분명하다. 모든 경제권을 쥔 아비는 그 권력을 놓고 싶지 않다. 제 손으로 일군 권력을 여전히 무위 도식하며 놀고먹을 궁리만 하는 아들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더 오래 그 권력을 쥐고자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 만 같다. 아들들은 자신들의 젊음을 착취하여 일만 시키고는 어떤 것도 내어놓지 않으려는 아비가 두렵다. 이 권력관계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정서다.


극 중 아비가 모든 것을 잃고 먼산을 볼 때, 아비가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권력이 아니라 아들들의 얼굴임을, 원로배우 오현경 선생의 얼굴이 대변한다. 그 얼굴에 어린 무수한 정서가 관객을 울린다.


반면 무대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인 동녀는 시대와 세대를 넘어서고 있지는 못하는 듯 하다. 동녀는 스님들에 의해 맡겨져서는 아비에게는 회춘의 도구로, 여자를 알지 못하는 아들들에게는 마치 꽃나무 같이 예쁘고 조용한 자궁으로 여겨진다. 말이 없는 이 소녀는 꽃나무 같은 제 운명을 제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간의 미덕이고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행복한 결말이라고 배운 탓일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슬펐다.


1984년에 초연된 이 작품의 동녀는 2017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한 것이 체한 듯 숨이 막혔다. 관련 글들을 찾아 보다 한 논문의 목차에서 동녀가 설화적 화해의 축이라는 표제를 읽었다.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서 동시에, 신화에 갇힌 여성은 절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로, 도구로 읽히는 여성성은 타인에 의해 정의된, 그리고 남성들에 의해 정의된 박제된 여성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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