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롱 Sep 27. 2017

시인의 사랑은

김양희 감독, 영화 <시인의 사랑>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시인의 사랑.


영화 <시인의 사랑>의 제목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시인의 사랑이라니, 과연 우리의 사랑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시인의 사랑이 가 닿은 종착지는 어디일지, 그 도착지가 궁금하다.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다. 시인의 눈으로 차 창밖의 사람들, 흔들리는 나무, 그 사이로 빛나는 햇살, 멀리의 바다와 반짝이는 파도를 하나하나 읽어간다. 그 모습이 좋았던 여자는 시인과 결혼한다. 시인의 밥벌이란 일천한 고로 시인의 아내는 그가 등단할 수 있도록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한다. 동갑내기 동창생인 시인부부는 격이 없다. 감정표현도,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내뱉는 일에도 거침이 없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 사이에 깊은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내는 아이가 갖고 싶다. 쉬이 아이가 생기지 않자 그들은 병원을 찾고, 시인의 정자가 의욕?이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렇게 인공수정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는 임신이 되지 않는 슬픔에, 남편은 자신이 마치 도구가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은 것만 같아 괴롭다.


그들의 슬픔과 우울, 서로에 대한 책망이 짙어질 즈음, 시인은 소년인지 청년인지 모를 사내를 만난다. 일단 그 사내를 소년이라 부르기로 하자. 아내가 힘내라고 사다 준 도넛이 이들을 만나게 한다. 시인은 소년의 말과 행동으로 부터 영감을 얻는다. 죽어라 써지지 않던 시가 써지고, 사람들이 그의 시에 수긍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영감을 좇아 소년을 좇는다. 그렇게 소년을 좇던 시인은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소년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다시 또 그 쓰인 마음을 좇아 소년의 형편과 마음을 살피며 주위를 맴돈다. 시인에게 사랑은 영감이자, 자신을 시인이게 하는 것 같다.


소년은 몸져누운 아버지와 오랜 병간호와 생계로 모질어진 어미와 셋이 산다. 아르바이트로 소일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자신의 불우함을 떨쳐보려 애쓰는 소년은 이상하게 자신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사정을 돌보는 시인이 싫지 않다. 부모도 돌보지 않는 나 자신을 저토록 정성스럽게 돌보는 남자가 이상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프다. 같이 걷고 산책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트고, 어느새 그 감정은 우정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조금 부족한, 다른 이름이 필요 할 것 만 같은 그런 무엇이 된다.


아내는 남편의 낌새가 너무나 이상하다. 그의 시어에서, 그의 작은 행동과 말투에서 아내는 사랑을, 연애의 감정을 읽어낸다. 그렇게 아내의 의심과 질문이 날카로워질수록, 시인은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점점 더 깊이 다가간다. 아내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가졌고, 믿을 수 없는,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남편의 감정에 처음에는 어리둥절 웃어넘기다, 화가나서 망신을 주고 분해 하다가, 나중에는 그의 부재가 두렵고 무서워서, 최후에는 너무도 간절하게 그에게 매달리고 만다. 그것은 꼭 뱃속의 아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매달림은 조금의 구차함이 없는 너무도 순수한 간절함이며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다.


시인과 소년은 왜였는지,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선명해져 버린 자신들의 감정에 솔직해지려고, 모든 것을 걸어보려고 한다. 소년은 아내를 만난다. 그것은 아마도 아내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리라.(잘 차려 입은 아내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내는 그녀가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 그리고 그가 이제 아버지가 되었음을 소년에게 말한다. 소년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싶다. 자신도 사랑받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함, 그리고 그 간절함 속에 있는 시인과 그의 아이의 행복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것은 소년의 사랑이다.


시인은 그렇게 소년을 떠나보낸다. 사랑은 사랑할 때에도, 사랑이 머물고 간 이후에도 영감인지라,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그 시 안에 그의 사랑이, 절망과 그리움이, 그리고 그것들이 뒤섞여 삶이 된 시어들이 있다. 시인은 그 시로써 더 시인이 된다. 시인과 소년은 우연히 재회한다. 그 우연은 너무도 영화적이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울 법한 그들의 재회는 제주도라는 공간적 제약으로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시인은 시인이어서,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도 간절해서 소년과의 재회를 매일 꿈꾼 것 같다. 시인은 언제고 만날 소년에게 전할 영감의 값을, 그 사랑을, 그리고 시인에게는 삶을 이어갈 희망이었을 선물을 소년에게 전한다. 그 선물은 소년의 지지부진하고 벗어날 길 없는 일상에 돌파구가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재회의 희망을 잃고 집에 돌아와 아이 앞에 앉아 눈물 흘린다. 그 눈물은 그렇게 슬프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 눈물은 아마도 시인의 사랑이다. 그리고 살아감에 대한 연민이다.



시시한 연애가 싫었다. 이제 사랑을 한다면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실은 시시한 연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시시한 나만 있을 뿐인데, 그저 연애를 탓하며 시시하다는 한탄만 이어 왔구나 문득 깨닫는다. 다만 시시한 내가 아니라서 누군가를 알아보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고 또 주며, 그래서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고(극 중의 아내의 대사처럼), 상대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기도 하고, 그렇게 선택된(선택'한'이 아니다) 삶 속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것, 그래서 시시해질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래서 영화 <시인의 사랑> 속 인물들의 사랑은 어느 하나 시시하지 못했다.


시인의 사랑이 도착한 곳은 다행히도 세 사람 - 시인 자신과 아내와 소년 - 의 사랑의 균형의 자리인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편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몹시도 안정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세상은 오히려 영화보다 막장인지라, 현실에서의 시인과 소년은 함께 떠났으나 헤어졌고, 아내는 아이를 홀로 키우며 다시 돌아온 남편을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떤 선택과 상황이 그들에게 더 행복을 줄지, 더 나은 선택이 될지 역시 알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도착할까. 우리 사랑도 그들의 사랑처럼 어느 정도는 균형있고, 각자가 나름의 행복을 찾는 지점에 가 닿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 눈물이 아주 짜지만도, 달지만도 않기를, 다만 간절해서 시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 후 작성한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룸바Rumb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