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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Nov 23. 2017

선한 밥벌이의 비애

작/연출 김수희, 극단 미인, 연극 <말뫼의 눈물>, 2017


스웨덴의 말뫼에서 왔다는 대형 크레인이 마을에 정박한다. 세계적인 조선업체 코쿰스가 문을 닫으며 내놓은 128m의 크레인이 마을에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한껏 부에 대한 기대로 들뜬다.


미숙과 수현은 동네 친구다. 미숙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장 조선소에 취직하여 정규직이 된다. 수현은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딱히 취업이 되지 않자 외국계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한다. 수현의 할미 두금은 조선소 인근에서 가게 겸 하숙을 친다. 하숙집에는 수현의 삼촌이자 두금의 아들인 인하와 마을 청년 진수와 정헌이 세 들어 있다. 인하는 조선소에 비정규직을 배치하는 인력회사를 운영한다. 방송국 조연출을 하다 마을로 돌아온 진수와 그의 후배 정헌은 하청업체 소속으로 모두 조선소 비정규직이다. 진수의 아버지 근석은 오직 자식을 위해 조선소에 충성하며 정규직이 되었다. 지금은 아들이 정규직 되기만을 바라며 전전긍긍이다. 하숙집에서 한잔씩 하는 조선소 일용직 정길과 그의 처 은옥도 하숙집의 단골들이다.      


조선소 현장 노동자들이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사고 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처우가 너무 달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어느 날, 추락사고로 사람이 죽고 이를 무마하려는 회사의 태도와 비정규직들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에 진수와 정헌은 문제를 제기한다. 급기야 진수는 골리앗이라 불리는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한다. 그저 살기 위해 하늘에 올라갔으나 멎어버린 조선소와 좁혀지지 않는 노사 간의 입장 차이, 그들의 부모와 자식들의 생계를 볼모잡고 압력을 행사하는 회사와 이슈를 이용하기에만 바쁜 언론, 그 사이에 파산하고 죽어나간 사람들로,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누구하나 애쓰지 않은 이가 없는데 마치 폭탄이 지나간 것처럼 누구하나 손에 쥔 것이 없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덮치자 그들은 모두 할 말을 잃는다. 그 슬픔의 한 가운데서, 미숙과 수현은 태어날 아이를 희망삼아 여전히 저 멀리에 서서 눈을 시리게 만드는 크레인을 바라보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밥벌이에 있어서 선善이란 먹고 살 만큼의 물질이 손에 쥐어지는 것일 게다. 그 물질로 먹고 마시고 비를 피하고 몸을 따시게 한다. 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돌보고 늙어 감을 달랜다. 살아감에 있어서 선善이란 아마도 이 밥벌이가 지속가능해서,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일일 것이다. 연극의 인물들은 모두 그들의 밥벌이가 위태롭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그들은 매일같이 수고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려고, 그것을 자기 자식에게도 물려주려도 무던히도 애쓰지만, 현실은 바람 같지 않다.     


극중 노동자들의 삶은 서로 촘촘하게 격자로 뉘어있다. 누군가는 기업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고용하는 노동자이고, 누군가는 그들 하청업체에 고용되는 노동자이다. 또 누군가는 이들 노동자들에게 밥과 술을 팔기도 한다. 기업이 노동자의 삶을 돌보지 않을 때, 하청업체들은 줄줄이 도산하고 그들에게 고용된 이들의 삶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심지어 정규직이라 해도 퇴직을 종용받을 수 있다. 그들이 더 배웠어도, 조금 더 좋은 대우를 받았어도 보장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상황이 감당이 안 되어 더러는 사기를 치고 도망한다.      


기업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있어서, 그 안의 노동자들의 수고로 우리가 먹고 입고 쓸 것들이 세상에 나온다. 기업이 제공하는 일터로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때, 동일한 노동을 해도 동일한 임금을 받을 수 없을 때, 최소한의 도덕과 균형이 사라질 때, 그리고 그 사라짐에 대한 인식과 경계도 없을 때,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죽느니 그 힘으로 외치겠다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을 욕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극 중의 노동자들은 각기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선택한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과 자식이기도 하고, 오직 경제적인 부이기도 하고, 더러는 보다 나은 노동환경과 동료들의 생계를 위해 움직인다. 그것은 묵묵하게 출근하는 모습으로, 파업과 고공농성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 슬픈 것은 어떤 선택이든지 그들의 삶이 불행으로 몰린다는 데에 있다.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이란 그저 불행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선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 겨우 ‘돈’이라니 너무도 허무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조금의 변화를 위한 선택들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연극으로 이야기 한다. 그 불행가운데도 삶을 이어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학력과 고용형태 등 노동자들 간의 갈등까지 보여주고자 한 점과 인물들 모두에게 발언권이 주어진 연출이 특히나 좋았다. 아쉬웠던 것은 아마도 원하지 않았을지 모를 임신이 희망으로 그려진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만 모두의 선택이 조금 더 선한 방향으로 기울기를, 그들의 그 선함이 한 곳에 이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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