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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Jan 04. 2018

권력의 해피엔딩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 오경택 연출, 국립극단 연극 <준대로 받은대로>

무엇이 해피엔딩인가. 대체로 악한 이가 벌을 받고 선한 자가 그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 문제가 해결되는 것, 정의가 구현되고, 앙숙인 자들이 화해하는 것, 피맺힌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아마도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준대로 받은대로 Measure for Measure>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는 듯 보이지만, 극 중 인물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복한 인물이 없는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빈센티오 공작은 자신이 통치하는 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 너무 자유로운 빈의 분위기가 못마땅하지만 나서서 강제하기에는 민심이 두렵다. 공작은 여행을 떠나는 척하며 금욕적이고 고지식한 앤젤로에게 자신의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공작은 수사로 위장하여 앤젤로가 통치하는 빈에서 시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앤젤로는 오래된 법률을 꺼내들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 그 중에는 혼전 관계로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클로디오가 있다. 이 해묵은 법으로 앤젤로는 클로디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 루시오는 그녀의 여동생 견습 수녀 이사벨라를 찾아가 오빠를 위해 구명할 것을 권한다.      


오빠를 구해줄 것을 간청하러 간 이사벨라에게 육체적인 정욕을 느낀 앤젤로는 자신과 잠자리를 하면 오빠를 구해주겠다 말한다. 이사벨라는 고민에 빠져 오빠를 찾아간다. 처음엔 동생에게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겠다던 클로디오는 어느새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야기 하며 오빠를 살리기 위해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 없는지 묻는다. 분노한 클로디오는 오빠에게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고민에 빠진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빈센티오 공작은 트릭을 제안한다. 어둠을 틈타 이사벨라 대신 지참금이 부족해 앤젤로에게 파혼당한 마리아나를 그의 침실로 보낸다. 그렇게 클로디오를 구하는 줄 알았으나, 앤젤로는 클로디오의 사형을 재차 명한다. 공작은 교도소 간수를 설득하여 클로디오 대신 이미 죽은 죄수의 목을 앤젤로에게 보낸다.      


변장을 끝내고 다시 빈에 복귀한 공작은 시민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그 자리에서 그간의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무대에 나와도 좋다고 제안한다. 자신을 취하고도 오빠를 죽인 줄 알고 있는 이사벨라는 공작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그리고 앤젤로의 죄를 고발한다. 누구도 믿지 않아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던 앤젤로 앞에 공작은 자신이 수사였음을 밝힌다. 공작은 앤젤로에게는 마리아나와의 결혼을, 그리고 수사일 때 자신을 조롱하던 루시오에겐 창녀와의 결혼을 명하고, 죽은 줄 알았던 오빠와 재회한 이사벨라에게 공작은 느닷없이 청혼한다. 연극은 이사벨라의 침묵으로 막을 내린다.     



언 듯 보면 극은 마치 해피엔딩인 것 같다. 각각 자신의 짝을 찾았으며(?) 억울하게 죽은 자가 없고, 억울함은 해소되었으며 원수를 용서하였으니 말이다. 대체로 의도하지 않게 처하게 된 문제 앞에 고군분투하며 해결에 이르면 우리는 그것을 해피엔딩이라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연극을 꾸미고, 사람들을 지켜보고 조정하며 상황을 쥐락펴락하던 당사자가 재등장해 문제를 해결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모든 진실을 아는 전지전능한 공작이 그 신과 같은 권력을 이용해 속전속결로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다니...꺼림칙하기 이를데 없다.


앤젤로는 마리아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와의 결혼을 침묵으로 받아들인다. 창녀와의 결혼은 암살이나 다름없다는 루시오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창녀와 결혼한다.(원작의 표현을 빌어 창녀라 표기한다) 공작은 수녀가 되기를 원하는 이사벨라에게 그것이 마치 행복한 결말인 것처럼 청혼한다. 수락도 거절도 할 수 없는 그녀의 침묵은 과연 해피엔딩일까. 공작은 문제를 해결한 영웅이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두를 놀아나게 한 절대 권력의 연출가에 불과하다. 그 연출의 결과는 너무도 기괴하다.


준대로 받은대로 measure for measure 라는 제목처럼 그들은 그들이 헤아린 대로 헤아림을 받는 것 같지만, 연극의 무대가 끊임없이 이동하며 기울기를 달리했던 것처럼, 그들의 관계도 이미 기울어져, 권력을 지닌 자만이 엔딩을 결정할 수 있다. 정치는 쇼 show와 같다는데, 그들은 그저 이런 연극을 꾸밀 수 있는 권력을, 위치를 가졌을 뿐이다.




*주간기독교 2133호(170107) 문화짚어내기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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