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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Jun 07. 2018

네번째 사람

이보람 작가, 권지현 연출, 연극<네번째 사람>

자녀에게 부모는 절대적이다.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해주는 사람, 그래서 내 세계의 기초를 만드는 존재들. 먼저 세상에 나온 자들이 지어놓은 세상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으나, 막상 세상에 나와 보니, 그들이 쌓아올린 세상이 배운 것과는 다르게, 부정과 부패로 가득한 것을 알았을 때, 자녀들은 길을 잃는다. 누군가의 자녀이자, 또 누군가의 부모인 우리는, 스스로가 길을 잃었을 때, 또는 나를 따라오는 이가 길을 잃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출처 : 우란문화재단


17년 전, 검사인 은지의 아버지는 슈퍼살인사건을 담당한다. 당시, 용의자로 십대에 어눌한 말투의 재필이 붙잡힌다.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재필은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고 수감된다. 사건의 진범인 슈퍼 아줌마는, 뒤늦게 검사를 찾아가 자백하지만, 이미 절차가 다 마무리된 사건을 다시 시작하는 게 싫은 검사는, 앞으로 죄짓고 살지 말라며 아줌마를 돌려보낸다. 


감정표현불능증을 진단받은 은지는 슈퍼 아줌마를 죽인 혐의로 조사 중이다. 아줌마의 시체가 든 가방을 들고 들어와 스스로 붙잡혔다. 은지는 정말 아줌마를 죽였을까. 17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재필,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워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아줌마.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의 은지. 재필은 수감기간이 길어지고, 죄 없이 이렇게 갇혀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검사에게 편지를 쓰고, 이 편지는 은지에게 도달한다. 은지는 검찰청 앞에서 시위하는 아줌마가 재필의 사건과 연관됨을 알게 된다. 


출처 : 우란문화재단
출처 : 우란문화재단


아버지에게는 작은 부정한 사건이었을 뿐인데, 이 사건은 재필과 아줌마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아줌마와 재필에게 그 순간 신이었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옳은 판결을 내려 주리라 믿었던 검사로 인해, 평생을 되돌릴 수 없는 미안함과 억울함으로 살아가게 된 그들. 평생 누군가에게 짐을 떠안긴 일의 원인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은지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버지는 은지가 아줌마를 죽였는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딸은 죄인이 될 수 없으므로, 감정표현불능증을 이용하여 아이의 죄를 죄로 남지 않게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은지에게는 다 괜찮다고, 너는 좋은 것만 보고, 나쁜 것은 보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저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아버지의 태도를 은지는 이해할 수 없다. 감정표현불능증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의 정체가 알고 싶어서, 은지는 사건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사각형의 무대 내부에는 다시 사각형의 경계가 존재한다. 이 경계는 마치 은지의 내면의 경계 같다. 아줌마의 시신이 담긴 캐리어는 사라지지 않고 무대에 머물러 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만 던져버릴 수 없는 짐으로, 은지와 거리를 넓혔다 좁히기만 할 뿐 결코 떠나지 않고, 거기에 있다. 때때로 가방 밖으로 빠져나온 아줌마는 은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출처 : 우란문화재단


이미 부정한 것을 목도한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살면서 짓게 되는 무수한 태만, 실수와 죄 앞에서 우리는 최소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언제까지 죄를 덮고 숨기는 데에만 시간을 허비해야 할지 답답하다. 


은지는 우리에게 넌지시 우리의 해야 할 바를 일러준다. 되돌릴 수 없는 사안 앞에서는 좀 더 엄격해야 함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리고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지 않다고 말해주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과 같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기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사건과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네 번째 사람인 은지를 통해 종결되었으나 실은 종결되지 못했던 사건은, 비로소 진짜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세상 누구도 절대 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러니 이 세계에서 신을 찾지 말고, 진짜 신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에, 오히려 위로받는다. <소년B가 사는 집>을 통해 감동을 주었던 이보람 작가는 우란문화재단의 창작개발지원과정에 선정되어 트라이아웃 공연으로 연극 <네번째 사람>을 무대에 올렸다. 트라이 아웃을 마치고 다시 무대에 오를 때, 직접 가서 이들의 결말을 만나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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