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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Aug 06. 2018

악몽

장 랑베르 빌드, 로랑조 말라게나 공동연출, 연극 <리처드 3세>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중간에 배우의 대사와 자막이 일치하지 못하거나 정지한 부분이 있었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그렇듯이 너무나도 긴 독백을 쫓아가지 못하면 몰입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여 기대만큼 마음이 벅차오르진 않았지만, 엔딩의 임팩트는 상당해서, 무대의 시간을 지킨 보람이 있었다. 본 적없는 무대 장치들도 신선했다. 올해 국립극장의 초청으로 처음 국내 무대에 오른 연극<리처드 3세>를 만나보자.




프랑스 언론으로 부터 ‘소름끼치고 놀라운 연극, 옛 형식을 벗어난 혁신적인 무대 연출’이라 칭찬받은 장 랑베르 빌드와 제랄드 가루티에 의해 각색된  연극 <리처드 3세>는 동명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플랜타저넷에서 랭커스터, 랭커스터에서 요크, 요크에서 튜더로 이어지는 영국 왕조의 전환과정에서 발생한 왕가의 전쟁을 다룬다. 리처드 3세는 어린 왕 에드워드 4세 치하에서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고자 왕위 계승 순위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왕이 되나, 통치 2년 만에 헨리 리치먼드(헨리 7세)와의 전투에서 폐하여 전장에서 숨을 거둔다.

     

연극은 리처드 3세가 무대에 등장하여 관객을 향해 자신의 나약함과 악함을 증언하는 장면으로 부터 시작한다. 그는 광대의 얼굴에, 잠옷을 입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엄마뱃속에서 산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왔으며 그 탓에 보기에 추하고, 어디서도 사랑받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자신은 더욱 철저하게 악인이 되어 살 것이라 선언한다. 자신이 악하게 살 수 밖에 없음은 필연이며, 그 외에는 선택지도, 다른 방법도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연극이 끝날 때 까지 광대의 얼굴과 잠옷을 끝끝내 벗지 못한다(않는다).  


그가 퇴장하고 무대에 9척(尺)은 되어 보이는 앤이 등장한다.(앤의 기형적으로 큰 키는 리처드를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앤은 그의 시아비와 남편을 잃고 슬피운다. 그들을 죽인 장본인인 리처드 3세는 세자빈인 앤에게 다가가 자신이 그들을 죽인 것은 실은 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녀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구애한다. 처음에는 강하게 거부하던 앤도 그의 끈질긴 구애에 마음을 연다. 악한 리처드는 속으로 그런 그녀를 조롱한다. 그는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왕위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를 거친다.


여타 극들이 악인이 선한 척하며 숨겨지다 종국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긴장감을 준다면, 이 작품은 초반부터 주인공의 악함을 드러내고 악인으로 못 박아, 관객들이 그가 행하는 악한 행실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권력을 향해 가는 과정에 공감하게 만든다. 그가 거짓으로 사랑을 구애할 때, 그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악한 자식이라 욕을 먹을 때, 조카들을 죽일 때, 앤을 내치고 조카딸을 얻고자 애걸할 때도, 그가 끊임없이 타인을 이용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숨기고 조정하면서, 실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모습 속에서 관객들은 함께 절망한다. 그가 그토록 손에 쥐고자한 권력이 얼마가지 못해 힘을 잃고 너무도 쉽게 빼앗길 때는 그의 악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어두움에 처해진 기분에 빠진다.



관객은 무대를 통해 악몽을 꾼다. 이것은 착한 이가 고통 받는 악몽이 아니라, 악한 이가 악함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 받는 악몽이다. 붉은 무대, 뱅글뱅글 돌아가는 얼굴들, 말하는 풍선, 정신을 흩어지게도 아득하게도 만드는 음악, 갑자기 튀어나오는 의자와 어둠속에 스스로를 매달아버린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유럽판 이토 준지(いとうじゅんじ, 伊藤潤二, Ito Junji)의 작품을 보는 것같이 기괴하고, 동시에 익살스러워서, 이 끔찍한 이야기에 감히 웃어도 좋은가 싶어진다.


오직 두 명의 배우가 극을 이끄는데, 셰익스피어 극답게 어마어마한 대사를 끊임없이 토해내며 표정을 바꾸는 배우들의 열연은 무대를 가득 메우고 남는다. 중간 중간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고,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 무대 위의 다양한 도구들을 끊임없이 활용하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130분, 인터미션도 없이 장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끝에 마주한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몹시도 슬픈,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관객의 마음을 가둔다. 자신이 그토록 얻고자 한 국토를 말 한필과 바꾸기를 애원하는, 죽음 앞에 선 왕은 가엾다. 그를 악한 왕으로 돌리고, 악인이 심판받았다고 좋아하기는 어딘지 찜찜하다. 어쩌면 그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라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악인이 될 것을 선택하고, 그런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할 수 없었던 리처드 3세에게서 각자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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