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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24. 2016

동정 없는 세상, 욕망의 몽타주

롤란트 시멜페니히 작, <황금용(Der goldene Drache)>

극작품은 당연하게도 그 시대를 반영한다

혹은 당위적으로 그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 최근 독일은 시대를 반영한 동시대 연극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몇 해 전 게릴라 소극장에서 선보인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크(Mayenburg)의 <못생긴 남자>에 이어 최근 독일연극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롤란트 시멜페니히의 <황금용(黃金龍, Der goldene Drache, 2009)>이 2013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최우수작품상, 연출상을 수상하고 다시 무대에 올랐다. 원작은 2010년 뮐하임 연극제에 초청받아 희곡작가상을 수상한 이래로 세계 40여 개국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배우들이 등장하기 전 비어있는 무대


<황금용>은 5명의 배우가 22개의 배역을 소화하며 48개의 파편화된 장면들을 연기한다. 극 초반엔 쪼개진 장면들을 쫒느라 정신이 멍하지만 어느 순간 그 파편화된 장면들이 이루는 공통된 정서와 공허함, 일상이 되어 버린 잔인함에 집중하게 된다. 그 사이 사이마다 영민하게 웃음이 비집고 들어선다.


타이-차이나-베트남 간이식당인 황금용 식당엔 다섯 명의 불법체류 요리사들이 주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타이인이거나 차이나인이거나 베트남인 혹은 여느 아시아인이다. 황금용 식당이 자리한 건물엔 식료품가게도 있고 각각의 사정이 다양한 입주민들이 가득하다. 입주민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갈등을 하나씩 떠 안은 듯 다채롭다. 불법이민자들과 입주민들은 각자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절망을 안고 한편으로는 욕망을 드러내며 죄의식 없이 폭력을 자행한다.     


기본인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처지와 그들을 도구로 취급하는 자들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며 이제 더 이상 유럽의 것만도 아니다.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연극은 잘 알고 있다. 값싼 동정을 피하기 위해 극의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파편화되고 대사와 대사 사이를 억지로 끊으며 사건이 진행되는 모든 순간을 해설한다. 또한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性)과 나이 등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사건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우화 개미와 베짱이는 성적착취와 폭력을 동물에 빗대어 직시하기 힘든 노골적인 폭력을 목도하게 만든다.


극의 주요 뼈대는 황금용의 막내 요리사, 꼬마라 불리는 중국청년에게 있다. 동생을 찾으러 이역만리를 날아온 꼬마는 치통으로 극중 내내 고통을 호소한다. 병원에 갈 수 없는 꼬마의 입에 술을 들이붓고 동료들은 렌치로 이빨을 뽑아준다. 뽑힌 이빨은 하늘 위로 훨훨 날아올라 같은 건물에 사는 금발머리 스튜어디스 잉가가 주문한 타이 스프에 빠진다. 피를 철철 흘리던 이름 없는 중국청년은 결국 과다출혈로 죽고 황금용이 그려진 커다란 카펫에 둘둘 말려 강에 버려진다. 죽고 나서야 청년은 바다를 건너 자신의 고향집에 다다를 수 있다. 썩어서 구멍 난 타인의 이빨을 스튜어디스 잉가는 자신의 혀로 찬찬히 느껴본다.  


그 괴이한 사건! 타인의 썩은 이빨이 주문한 스프에 들어와 자신의 혀로 그 구멍을 찬찬히 느껴보는 그 괴이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아무도 어떻게 썩어 구멍 난 이빨이 타이 스프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질문하지 않는 것이 더 괴이하게 느껴진다. 어째서 이 괴이한 사건에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인가.      


역자 이원양 교수의 역자 후기에, 롤란트 시멜페니히의 연극 <황금용>을 가리켜 초현실주의적인 텍스트 몽타주라고 했다. 5명의 배우가 22개의 배역을 소화하며 48개의 파편화된 장면들을 연기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 대사와 대사 사이는 그 사이에 정지된 시간까지도 관객에게 텍스트로써 해설한 것을 이른 것이다.


무엇이 개별적인 상황과 사건을 결속시키는가를 탐색하는 것


이 중요하다는 원작자의 말처럼 각각의 파편적인 장면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지만 어느새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결속되어 유기적인 사건들로 관계 맺는다.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인 잔인함과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꿈틀대는 모습, 타인의 사연에 무관심한 모습이 그런 일상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다. 그 서늘함을 목도하기를 주저하는 관객들에게  그 서늘함을 전하는 것이 연극의 역할이지 않은지, 그런 연극을 때때로 찾아야 하는 것이 관객의 의무이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 <황금용(黃金龍, Der goldene Drache)>

롤란트 시멜페니히 작, 이원양 역(2014년 윤광진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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