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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Sep 20. 2018

구원과 분노 사이

연극<이방인> 알베르 카뮈 원작, 임수현 번역, 각색, 연출


알베르 카뮈 원작의 <이방인>이 극단 산울림 임수현 연출가의 번역과 각색으로 홍대에 위치한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8.21.~9.16.)됐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모호한 답변을 입에 달고 사는 뫼르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간절한 것이 없는 그에게, 양로원에 모신 어머니의 부고가 날아든다. 어머니의 죽음을 채 감각하기도 전에 장례가 끝나고 그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만난 양로원장도, 그곳 관리자도, 어머니의 친구 마저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 무덤덤한 뫼르소가 의아하다. 뫼르소는 장례에서 돌아와 마리와 해수욕을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사랑도 나눈다.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상황에 몸을 맡기며 지내는 그에게 꼭 이루어야할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


그의 이웃인 레이몽은 동네에서 평판이 안 좋다. 레이몽은 애인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 분개하다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뫼르소를 끌어들인다. 뫼르소가 대신 써준 편지로 애인을 꾀어내어 급기야 때리기까지 한 레이몽. 딱히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뫼르소는 경찰들 앞에서 그를 옹호하는 증언을 해준다.


레이몽은 뫼르소와 마리에게 친구내외가 사는 해변으로 놀러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방문한 해변에서 그들은 레이몽에 해코지하려는 전 여자친구의 오라비 무리를 만나, 실갱이가 벌어진다. 크게 번질 싸움을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가, 홀로 산책이 하고 싶어진 뫼르소는 집을 나선다. 그 길에서 뫼르소는 무리 중 홀로 남겨진 오라비를  발견한다. 뜨거운 태양을 핑계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한발, 그리고 다시 네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의 행동에 대하여 심문이 이어지고,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감방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검사는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는 무감각하고 무정한 인간이라서,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살인에 대해 전혀 뉘우치지 않으며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의 사형을 주장한다. 그는 슬픔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이 어째서 살인과 연관 지어지는 것인지 의아하다. 또 자신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불편하고 귀찮다. 사람들은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관습이 정한 인과를 찾아 내지 못하자 그을 인간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자들에게 자신을 소명해야 할 이유를,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 앞에 죽음이 언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는다.


감방에서 발견한 찢겨진 신문기사에는 체코의 어느 여관에서 금의환향해 돌아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어미가 금품을 노리고 자신의 딸과 제 아들을 죽인 기사가 실려 있다. 사실을 알게 된 어미와 누이가 모두 자살했다는 기사. 연출은 이 기사를 바탕으로 쓴 카뮈의 희곡<오해>의 마르타를 감방에 불러들여 그녀의 독백이 무대를 가득 메우게 한다(원작 소설에는 기사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독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들을 죽인 어미와 누이를 극악무도하다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삶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고단한 것이어서,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당시에 그들이 알지 못했음에 있다. 뫼르소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떠올린다.  


뫼르소가 느끼는 절망. 그의 절망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또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불인정과 불신은 그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생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지게 한 것 같다. 그에게는 꼭 지켜야 하는 어떤 것도, 가슴 깊이 열망하는 것도 없다. 그는 그저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한채 모든 것이 흘러가게 둔다. 그렇게 흘러가다 마주하게 된 죽음만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게 하는 그루터기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에게 사제가 찾아온다. 그렇게도 거절했던 사제가 끝끝내 그를 다시 찾아와 그를 아들이라 부른다. 죄를 인정하고 신을 믿기를 권하는 사제에게 보이는 뫼르소의 적대감과 분노는, 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의지 없음과 무심함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그의 저항은, 어쩌면 신을 핑계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를 오로지 체험하려한 그의 고집일지 모른다. 그 동안 전혀 감각할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함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또렷해짐을 느낄 때, 불쑥 다가온 신의 존재. 이제 와 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을 핑계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체험하려는 그의 태도에 수긍이 가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처한 자신의 모순에 몸부림치는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런 그의 고집과 나약함은 낯설지가 않다. 그의 절망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거짓말일지 모르겠다. 실은 그의 모든 시도와 부정, 그의 깊은 절망은, 지금 신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 버거워, 믿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일찍이 가졌던, 경험했던 절망이 아니었나, 기억을 더듬는다.


무대는 원형의 계단으로 사방이 막혀있다. 그 막힌 원형을 벗어나지 못하는 뫼르소는 마치 스스로가 쌓은 비극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 같다. 그는 행복하다 말했으나 나는 어디서도 그의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절망은 스스로 이방인 되기를 택한 자의 몫. 연극을 보고나서 다만 예수와 같이 기도하고 싶었다.


“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그를 못 박으려는 자들을 보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눅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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