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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20. 2016

고립된 사람들이 사는 나라

김재엽 연출, 연극<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

‘배수지진(背水之陣)’이라는 말이 있다. 이 고사성어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데, 한(漢)나라 한신(韓信)이 군대를 이끌고 조(趙)나라와 싸울 때 뒤로는 강을 등지고 앞에서 달려오는 적에 결사항전(決死抗戰)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결국 승리를 얻어낸 고사에서 유래한다. 대승을 거둔 후에 부장들이 한신에게 어떻게 배수의 진을 치게 되었는지 물으니 ‘자신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음으로써 살 길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한 병서(兵書)를 쫒아 병사들이 살길을 찾아 흩어지지 못하게 사지에다 몰아넣은 것이라고 답한다. 결사의 각오로 싸우게 하기위해 자기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는 장군의 말이 슬프고 두렵게 느껴진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렇게 죽음에 내몰린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는 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천지사방이 막혀버린 외로운 섬,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아비규환이 된 후쿠시마를 배경으로 한다. 도쿄의 한 방송국 보도부의 코모토는 대학 동기이자 국회의원인 오다기리에게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정보를 듣고 관련 하여 보도를 하려하나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친다. 뜻을 꺾고 다큐멘터리 제작부로 옮겨 온 코모토는 쓰나미와 지진으로 얼룩진 피해자들의 삶을 담고자 이시노마키 지역으로 향한다.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고 피난생활을 하는 타이요 가족을 취재하면서 가족들과 마을사람들간의 기묘한 관계, 자원봉사자들과 현지인들과의 문제, 통조림 도난사건 등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다큐멘터리 촬영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코모토 자신도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뒤의 도쿄, 타이요 가족들과 코모토는 그 사건 이후로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며 신규 원전 건설로 더 큰 갈등에 처한다.



 쓰나미로 엄마를 잃고, 겨우 구조되었으나 엉뚱한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누나까지, 어린 타이요는 지진과 쓰나미로 고립된 시간동안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대재앙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비윤리적 행동들이 어째서 용인되는지 궁금하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 와중에 돈을 벌려고 원전폐기물을 나르다 세어 나온 세슘에 중독된 사람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또 나라의 부채를 막기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 건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 각각의 입장의 첨예함은 그 안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적 동요와 혼란으로 숨통을 조인다. 무엇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알 길 없는 그 막막함과 따갑고 무서운 외부인들의 시선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모두들 지쳐간다. 썩어가는 마을과 그보다 더 깊이 썩어가는 사람들 속내로 마을의 공기가 온통 썩어버려 숨을 쉴 수 없다는 타이요의 슬픈 절규가 극장 안을 가득 메운다.



  현재 우리나라는 23개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5개의 원전이 건설 중이다. 추가로 계획 중인 원전은 6개로 원전밀집도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그저 남의 나라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연극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원자력발전은 어떤 천연자원과 대체 에너지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번 사고가 나면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영구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는 기술력이 좋으니 안전관리만 잘하면 된다지만 우리나라는 원전가동 이후 670건 이상의 고장 및 사고가 있어 왔고 노후 원전도 밀실 안전성 평가만으로 연장운영하고 있다. 그 과정 가운데 어떤 비리가 있었을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안전은 다수에게 과정과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할 때 다소나마 담보될 수 있다. 더욱이 생명을 담보로 한다면 제론의 여지가 없다.     



노후원전의 위험은 연극의 배경인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더 분명해졌다. 후쿠시마 원전은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원자로 전기계통이 멈추고 비상용 전기 공급중단으로 전원이 끊겨 사고로 연결됐다. 원전사고 한 달 전에 수명연장을 한 원전에서 가장 먼저 폭발사고가 났다. 사고 이후 독일은 노후 원전 8기를 즉각 중단시키고 폐쇄했지만 우리나의 경우 30년의 수명을 다한 고리원전 1호기를 2007년 원자력법 개정을 통해 수명을 10년 연장했고 37년째 가동 중이다. 원전은 1기에 부품이 250만개나 들어가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작은 장애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로도 모든 위험을 예측할 수 없다. 후쿠시마 사고 발발 후 국내 원자력처장은 같은 해 한 칼럼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원전 르네상스’에 제동이 될까봐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웃나라의 안전성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전환은커녕 ‘원전 르네상스’라는 기치를 내건 것에 공포감마저 든다. 그렇지 않아도 복합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의 등 뒤에서 최소한의 윤리마저 저버린 것 같아 절망스러운 심정이다. 승리가 요원한 전투에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배수의 진을 치는 나라, 우리가 진정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생명을 담보로 무엇을 거래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배수의 고도>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온통 혼란한 2011년 나카츠루 아키히토가 무대에 올려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키노쿠니야 연극상 개인상, 요미우리 연극대상 선고위원특별상과 우수연출가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는 2013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을 수상한 김재엽이 연출을 맡아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의 마지막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하수상한 시절, 연극무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하다.      


* 이 글은 2014.06.10 ~ 2014.07.05 동안 연강홀에 오른 김재엽 연출의 연극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의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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