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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18. 2016

3편의 영화로 연극읽기

김수희 연출 <소년 B가 사는 집>

14세 때 살인을 저지른 대환이는 그 죄로 인해 6년을 복역하다 20세 성인되던 해, 모범수로 보호관찰 처분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의 죄를 마치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체 하며 아들의 자립을 위해 정비를 가르치는 아버지, 아들이 살해한 피해자 아이를 본 적 있는 엄마는 그저 대환을 숨기고 세상에 나서기를 두려워한다.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며 모든 일에 “괜찮아요”로 일관하는 대환이와 어떻게든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애쓰는 누나 윤아가 있다. 그 사건 이후로 대환이네 정비소는 악마의 집이라 불리며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다. 이따금 보호관찰관이 대환을 보기 위해 들르거나 이사 온 이웃집 새댁만이 소문을 듣기 전에 몇 번 들렀을 뿐이다. 대환은 내면의 또 다른 자신인 소년 B의 환상으로 자신의 죄와 매일 대면하며 불면에 시달린다.


연극 < 소년B가 사는 집>, 아들을 꼭 안은 죄인된 엄마


작년 4월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소년 B가 사는 집>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키지만 정작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꺼리는 청소년 강력범죄를 다룬다. 작가는 대환이의 죄는 분명하지만 죄에 대한 판단보다는 이런 사람, 이런 삶에 대해 기록해 두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통해 죄에 대한 분노를 뛰어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던 작가의 바람은 실현된 것 같다. 연극을 보고 나니 몇몇의 영화들이 떠올랐는데, 이창동 감독의 <시詩>(2010)와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2011) 그리고 최근작인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의 <스틸 앨리스>(2014)가 그것이다.


영화<시>, 여자로서 또 할머니로서 손자를 어찌 대해야 하는 걸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중학생 손자가 자신의 죄를 대면하도록 하는 할미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시>라면 <소년 B가 사는 집>은 마치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복역을 마치고 나온 소년과 그 소년의 가족들이 겪는 일상적 아픔들. 자칭 교육전문가라는 이웃집 새댁은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은 엄마의 잘못도 아이의 잘못도 아니라고 배운 척을 해대지만 그럼 대체 누구의 잘못이냐는 대환엄마의 물음에는 은근슬쩍 답변을 피한다. 대환의 집을 보며 악마의 집이라 손가락질하고 죽은 고양이를 던져대는 잔인한 동네 소년들을 보니 무참하게 친구들을 죽인 아들을 둔 엄마를 그려낸 <케빈에 대하여>를 떠올리게 된다. ‘악마를 낳은 사람도 악마’라는 따가운 시선 속 부모가 겪는 처참함의 무게는 세월이 지나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오히려 더욱 더 생소하게 마음을 누르는 슬픔과 고통의 무게다. 아무도 그런 상황 속에서 어찌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해 주지 않는다. 대환엄마는 자신과 이야기하기를 피해 도망친 새댁의 빈자리를 마주하며 방금 우린 뜨거운 차를 마치 얼음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킨다. 뜨거운 차를 들이마시면서 자기 자신을 벌하고 올라오는 설움을 삼키는 엄마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대환의 죄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그 이면을 마주하게 하는 강한 잔상을 남긴다. 무대가 어두워질 때 자신의 집에 붉은 페인트로 쓰인 저주의 말을 하나하나 지우던 지친 케빈 엄마의 무릎이 잔상과 겹쳐 보였다.


영화<케빈에 대하여>, 아들의 범죄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힘겨운 엄마


죄인을 아들로 둔 죄 많은 부모는 대환이 “같은” 아이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보호관찰관은 말한다. 대환이 “같은” 아이들이 마치 따로 태어나는 것처럼, 처음부터 운명 지어진 것처럼, 그래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유독 날이 춥지 않느냐는 관찰관의 말에 객지생활은 더 추운 법이라고 말한다. 대환이 “같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곳이 어디든, 심지어 자신의 집마저도 객지로 여겨지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늘 세상으로부터 추위를 느끼며 자신의 죄의 무게를 감당한다. 대환은 그들 집단 사이의 약속을 저버린 친구 지오를 광기에 사로잡혀 죽였다. 그런 자신이 다시 세상에 서도 좋은지 자신 내면의 소년 B와 씨름하며 신神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절박하게 사인sign을 구한다. 그리고 신은 그에게 답한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6)


대환의 싸움, 죄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그의 피투성이가 된 싸움 속에 그는 그를 둘러싼 부모의 얼굴, 누나의 얼굴 그리고 신의 얼굴을 통해 용서를 구할 결심을 한다. 아들의 살인으로 인해 빈틈없이 불행이 들어찬 가정을 둘러보며 오랜 시간 불행의 이유를 찾고자 했던 대환엄마는 불행이 그저 이유 없이 자신의 집에 방문했던 거라고 불행이 다녀간 자리에서 숨죽여 운다. 용서를 구하러 떠난 아들의 뒤로 아버지는 집 앞의 고장 난 전등을 고치겠다며 그 뒤를 따라 나선다. 이제 다시 집 앞에 환한 빛이 들 수 있도록 말이다.


영화<스틸 앨리스>, 기억과 지각이 아득해지는 앨리스의 망연한 표정


이제 마지막 영화 <스틸 앨리스>. 촉망받는 50대 초반의 언어학자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기억과 인지 감각을 잃어가는 엄마 앨리스에게 막내딸이 묻는다.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못한, 물을 생각조차 못했던 질문을 던진다.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기분이 어떤지, 세상이 어찌 감각되는지,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앨리스는 자신의 황망한 마음과 적응 과정을 설명하며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딸에게 답한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다녀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불행이 다녀갈 때, 우리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대개는 짐짓 모른체 딴청을 한다. 누군가에게 불행이 다녀갈 때, 우리의 할 것은 다만 질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행을 감당하는 당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세상이 뭐라하는지, 그래서 견뎌지는지를 묻자. 얼굴을 마주보고 그 마음을 들어주는 것만이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살아갈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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