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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22. 2016

스크린으로 만나는 연극

"NT Live", 샘 멘데스 연출, 연극 <리어왕>

‘NT Live(National Theatre Live)’란 영국 국립극장이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자 무대 공연을 영화관 스크린에 실시간 상영하는 프로젝트다. 2009년부터 약 20여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되었는데 2014~2015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국내 국립극장에서 <코리올라누스>와 <리어왕>을 상영했고(2014), 이를 이어 <프랑켄슈타인>, <다리에서 바라 본 풍경>, <워호스>(2015), 올해는 <햄릿>과 <코리올라누스>까지, 매년 스크린으로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을 스크린으로 선보이고 있다.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호흡해야 한다. 그 호흡은 매회 동일할 수 없으므로 같은 제목의 작품이라 해도 매회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무대를 기반으로 하는 공연 예술을 스크린에 담을 때 그것을 공연물로 받아들여도 좋은가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직접 보고나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비싼 티켓 값은 물론, 구하기도 어려운 영국 국립극장의 표(비행기표는 차치하고서라도)를 구했다고 가정하자. 소극장의 연극은 그나마 좌석 간 차이가 크지 않지만 큰 극장일수록 좋은 좌석에 앉아야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즐길 수 있다. 남산에 앉아 영국인이 사랑하는 명품배우인 사이먼 러셀 빌의 섬세한 연기(미간의 주름과 얼굴의 떨림까지)를 대형화면으로 보고 있자니, 무대가 분할되고 움직이며 솟아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니, 나중엔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연극의 기본이 무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현장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극을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샘 멘데스 연출, 연극 <리어왕>



늙어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어진 리어왕은 자신의 세 딸들을 불러 가장 애정이 깊은 딸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겠다 한다. 첫째 고네릴과 둘째 리건은 아첨하는 말로 왕국을 상속받지만 가장 기대를 받았던 막내 코델리아는 자식의 당연한 도리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라 고백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고 추방되기에 이른다. 분별을 잃은 것 같은 왕을 말리려다 충직한 신하인 켄트마저 추방된다. 아첨하는 말에 기대어 두 딸의 집에 머물게 된 리어왕은 자신의 늙음을 분별없음으로 몰아세워 시종의 수를 줄이길 원하는 딸들의 태도에 서러움과 분노를 느낀다. 딸들의 처사는 점점 도를 넘고 왕의 분노도 이와 함께 하늘을 찌르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말은 거의 광기에 가깝다. 모든 비극이 그러하듯 권모술수와 치정, 죽음이 그 속에 있다. 왕의 곁에서 그를 모시는 바보광대(실은 가장 똑똑한 익살꾼이지만)가 왕에게 말한다.


네가 내 광대라면, 때 아니게 늙었다며 두들겨 팼을 거야.
현명해진 연후에 늙었어야지.

늙는 것은 자연의 순리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로부터 공경 받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나 우리의 늙음이란 ‘현명함’ 뒤로 유보되어야 함을 광대는 꼬집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명함은 무엇이며, 채 현명해지기도 전에 늙어버린 우리의 죄는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걸까. 늙음이 죄가 되는 것은 젊은 자들이 노인을 아이로 취급하며 그들을 꾸짖고 버릇을 고치려들 때, 자연의 한계의 가장자리에 선 자들의 분별을 믿지 않고 그들이 그들보다 더 젊은 자들의 통치와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을 때, 노쇠함에 맞게 행동하기를 요구받을 때, 늙은자 스스로 회초리를 그들 젊은이의 손에 넘겨줄 때 바로 그때 시작된다.


늙은자의 어리석음은 그들 스스로 바지를 내리고 자녀의 얼굴 찌푸림에 마음 쓰며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함에 그 대가를 온몸으로 치른다. 아버지의 분별을 혼수상태로 취급하여 복종하는 아버지로 만드는 것이 현명함으로 존경받는 것이라는 두 딸들에게 리어왕은 다채롭고 극심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그 말이 어디 하나라도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리어왕의 죄는 마차가 말을 끄는 것처럼 자식들이 부모를 능멸할 것이 ‘어쩌면’ 뻔한 것임에도 방치한 ‘미필적 고의’에 기인한다. 그 우둔한 죄의 값을 그는 무대 위에서 내내 감당한다. 왕으로서, 아비로서 자신의 쓸 것을 정하는 데에 ‘필요를 따지지 말라’는 리어왕의 절규는 비정한 딸들로 인해 ‘늙음’의 깊이는 온전히 ‘슬픔’의 깊이로 치환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로 1999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샘 멘데스(Sam Mendes)의 시간을 초월한 연극 연출은 1992년부터 꾸준히 무대 예술 감독을 맡아온 저력을 과시한다. 현대적인 의상과 무대 미술, 단호한 장면전환과 웅장한 음악, 무엇보다 섬세한 연기를 담아내는 연출을 스크린으로 만나는 것은 굉장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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