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추스리고 고인을 추모하는 일
광주로 출장가는 길, 아버지 바로 위 형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5남 4녀, 9남매 중 6째고 형제로만 치면 넷째다. 고인이 된 셋째 큰아빠는 평생을 직장생활을 하고 큰엄마와 자녀들을 끔찍히 위하신 분이었다. 늘 몸이 약했던 부인, 그니까 큰엄마를 보살피셨는데, 퇴직후 큰 엄마가 결국 병석에 눕자 병간호에 매진하셨다. 그러다 본인도 병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걱정하던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처음 소식을 듣고는 맘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엄마가 큰 아빠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어쩌냐고 속상해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살짝 저릿했다. 엄마, 아빠가 다 아프게 되자 사촌오빠와 동생은 더 열심히 일했다. 밤낮으로 몇가지 일을 하고 연애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문자를 주고 받고 이따금 밥을 한번 사는 것외에는 해준 것도 없다. 문상을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 사촌 형제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맘이 먹먹하다. 큰 엄마에게는 아직 소식을 못 전했다고 했다. 평생을 의지하고 산 남편이 이제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전할 엄두를 못내는 거다.
우리가 어릴적, 넉넉하지 않아 빛다른 과자 먹는 일도 쉽지 않을 때, 롯데제과에서 근무하던 큰아빠는 명절이면 어린이용 선물상자를 집집마다 챙겨주시곤 했다. 그런 큰아빠가 얼마나 멋져보였던지. 엄마는 명절이면 용돈도 넉넉하게 못드리는 터라 하루 일찍가서 며느리 노릇을 톡톡하게 했는데, 늘 늦게 오는 큰엄마를 얄미워하면서도 약한 자기 부인을 명절마다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게 하는 대기업 다니는 큰아빠를 부러워했었다.
아빠는 이미 장례식장인듯 하다. 엄마는 전화로 좋은 분이었다는 말만 연신한다. 서울에 도착하면 동생과 일단 장례식장으로 가야겠다. 대학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집안에 장례가 없었다. 이제 나도, 사촌들도 나이가 들어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시기가 오는건가 싶어 두려운 마음이 든다. 장례는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다. 그저 상주된 형제와 형과 동생을 잃은 형제들 곁에 있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