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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30. 2016

이미 살아버린 미래

윤한솔 연출, 연극 <1984>

(사진 출처 : 플레이디비)


1949년에 쓰인 소설 <1984>는 조지 오웰의 묵시록의 다름 아니다. 1984년은 우리에게 이미 한참이나 지난 과거이지만 그의 묵시록의 처참함은 과거의 산물로만 남기기에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의 뿌리와 강하게 맞닿아 있다.


오웰이 창조한 세계는 빅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끊임없는 감시와 언어조작을 통해 사상을 제약하며 개인의 삶을 통제한다. 전쟁을 반복함으로써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정당화하고 전쟁과 통제라는 순환을 영구적으로 이어간다. 이런 체제 속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연인 줄리아와 함께 저항세력에 가담해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부 당원 오브라이언의 덫에 걸려 윈스턴은 그의 정신마저 체제에 지배당하게 된다. 결국 윈스턴은 고문과 세뇌를 통해 진심으로 빅브라더를 받아들인 뒤 죽음을 맞이한다. 오웰의 작품 속 국가는 사람들의 정신과 사고를 묶어둠으로써 자신의 거대한 체제를 유지한다. 마치 유기체처럼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이에 반항하려는 부속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도려낸다.



연극은 소설이 이야기하는 삭막하고 차가운 가상의 세계를 가시적으로 담는 데 성공했다. 민머리의 배우들은 일렬로 나란히 앉아 팔과 몸과 머리를 휘두른다. 그들의 몸에 비추인 빛은 또다시 그들과 나란한 그림자를 만들어 무대 위를 가득 채운다. 그들 뒤로 흐르는 전자음악과 감시용 텔레스크린으로 보이는 모니터들에 번쩍이는 영상(영상은 무대 위를 실시간 녹화하여 현장의 장면을 재생한다), 부지런히 한 방향으로 그들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벨트, 한 귀퉁이에 펄썩이는 채석장의 먼지,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린 무대 위 배우들, 그들이 입은 옷에 쓰여진 그들의 이름과 그들을 나타내주는 기록 등 아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오웰은 니체의 말을 인용했고 그 말은 다시 무대에 재현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지는 힘.
(War is Peace. Freedom is Slavery. Ignorance is Strength.)


전쟁은 국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도구다. 개인은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체제에 자유를 부여한다. 그들의 무지는 이 끔찍한 순환을 지속시키는 엄청난 동력으로 국가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내어준다. 체제의 잔인함은 그들이 어떤 순교자도 용납하지 않는 데에 있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이지 못한 체제”에 돌을 던지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국가는 어떤 영웅도 영웅이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어떤 영웅적인 인물도 국가에 예속된 지극히 작은 부속으로 치부하여 체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세뇌하고 순응시킴으로 영웅적 맥락을 잃게 한다.


체제 혹은 권력이라는 유기체는 우리 손에 잡히지도 않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지배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지배한다. 그리고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이자 미래이며 현재라고 말한다. 윈스턴은 그런 그들에 대항해 기억, 기록, 정신으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외치지만 그 외침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외침의 부질없음이 관객의 마음을 후빈다. 체제는 윈스턴에게 말한다. 너는 순교자가 될 수 없다고, 네가 말하는 “인간다움”과 “도덕”이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윈스턴의 눈앞에 들이민다.


윈스턴이 결국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He loved Big Brother.”)은 개인의 파멸이란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복종하는 “굴종”에 있음을 보여준다. 조작된 세계에 의해 우리의 언어는 마비되고 사고의 폭은 좁아져서 감시의 주체가 없어도 스스로 감시에 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을 위해 불안한 삶을 살아내다 끝내 파멸하는 개인의 삶은 연민보다는 공포를 전한다.



우리의 파멸은 암흑을 거둬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암흑에 도사리고 있는 실체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에 기인한다. “이미 살아버린 미래”란 도무지 바뀔 것이 없는 예견된 미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의미를 잃은 세계이다. 정지된 우리의 사고와 조금의 동요도 없는 우리의 육체로는 어떤 기대와 변화를 구할 수 없다. 우리를 위한 수단인 줄 알았던 권력이 그들의 목적으로서 도리어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권력을 영속하기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뻔한 미래는 미래일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일 뿐이다.


‘주제와 예술 형식의 진보를 고민하는 연극’을 지향하는 극단 그린피그는 연극 <1984>를 통해 실험적 무대와 연출로 과감하고 거침없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우리의 1984년은 지금의 무대를 통해 이것은 과거가 아니며 당신들의 현실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과거의 세계에 두어서는 안 된다.




* 제2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윤한솔 연출작.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미래주의 이론의 창시자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1909)' 이후 미래가 의미한 것들과 약속한 것들을 재조명하였다. (.2014/09/23 ~ 10/18,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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