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힘을 주고 살 것.
스트레스가 넘치는 세계 속에서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몸에 힘을 주고 살 것.
세상사가 너무 긴장의 연속이라 힘 빼는 기술이랄지 이완과 명상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개인 개인이, 모두 스스로가 대단히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에 이완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는 것 같다. 물론 업무강도라는 것이 존재하고 업무성격상 스트레스가 높을 수밖에 없는 직종과 직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의 노력과 선택으로 원하여 처한 환경에서, 스스로를 너무 스트레스에 취약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조금 경계하고 싶다. '긴장'은 어떤 측면에서 삶의 활력이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오히려 때론 긴장이 나를 조금 더 나은 세계로 이끈다.
운동 역시 몸의 근육에 긴장을 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옳은 방향으로 적당히 힘이 생기도록 반복하며 근육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핵심 아닌가. 운동의 힘은 반복과 지속에 있다. 하다가 안 하면 소용이 없고, 계속 주기적으로 실행할 때 효과가 유지된다. 결국 근육을 유지하는 것은 지속적인 반복에 있다. 특별히 운동을 할 여유가 없는 육아인은 몸에 힘을 주고 걷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코어에 힘을 주고 걸을 것. 최근에 인스타그램에서, 멀쩡한 사람도 병원에 2주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다 빠지고, 병자가 된다는 글을 읽었다. 일상의 움직임이, 사소한 일상의 긴장들이 우리를 최소한의 건강으로 이끈다는 의미일 것이다. 출퇴근과 식사 챙김과 가족 돌봄과 같은 것들. 일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 생각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트레스는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내게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해진다. 모든 자극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일지, 말 그대로 긍정적인 자극으로 받을지는 어느 정도 본인의 선택에 달린 것. 이완과 쉼은,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일한자, 행동한 자가 누려야 할 어떤 것 같다. 스트레스가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은 이런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스트레스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감당할 만한 것인가, 이 시기가 지나가는 것인가 같은 것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때론 이것조차 사치인 상황도 있지만. (다 나 스스로에게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
우리 아이는 15개월에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해서 이제는 유치원생이 되었다. 주변의 어른들이 빨리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가엾다며,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는데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순수하게 좋은 의도셨지만(?), 그 말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걸 보면, 마음이 꽤나 불편했었던 듯하다. 그 말이 일하는 엄마를 책망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러니는 내가 프리랜서로서 일하거나 가사를 전담하는 롤이어서 집에 있다 해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며 최소한의 스트레스를 조금씩 받아가며 조심성을 기르고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엄마랑 둘이 있는 것보다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떠올리며 백화점 문화센터 한번 안 데리고 간 나를 종종 탓하기는 한다. 결과적으로도 긍정적인 것은, 집에서 떼도 쓰고 화도 내고 그러는 아이인데, 선생님이 한 번은 아이가 너무 순하지요? 좋으시겠어요라고 하셔서 당황한 일. 잠시였지만 ㅎㅎ 우리 아이가 순했구나 하며 다른 면을 발견하고. 아직 친구관계라는 것이 모호하지만 친구 개념이 생긴 것도 어린이집을 통해서다. 나하고 있을 때와는 다른 면들을 발견하는 것도 좋다. 아직도 갈길은 멀지만, 모든 것을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배워가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아이는 커갈수록 자기 자신 외에는 통제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배울 것이고, 세상과 자신의 기준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터다. 부모 된 우리 부부는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켜줄 자본이나 시간이 없다. 아이가 스스로 더 단단해지고, 거친 세상 속에서 그 와중에도 친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조력할 뿐이다. 부디 본인이 그리되고 그런 사람들과 더 연결되고 그런 영향력을, 메시지를 주변에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모든 과정은 긴장의 연속일 테지.
긴장이 때론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2002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우리 아이는 호랑이를 너무 좋아한다. 호랑이가 나오는 영상을 보고 싶다길래 이 영화를 떠올렸다. 전체관람가였고, 영화는 호흡이 길어서 아이에게 어떠려나 싶었는데, 제법 잘 따라왔고,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벌써 이만큼 크다니 놀랍다. 아이에게도 충격이었던지, 식충섬의 꽃 속에 이가 들어있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 파이는 스스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바다를 표류하는 동행자로서, 나를 위협하는 맹수로서, 최소한의 생명으로서의 긴장이 파이로 하여금 매일매일을 살아가게 한다. 어떻게 함께 공존해 나갈 것인가 끊임없이 묻고 방법을 찾는 사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태풍과 고래와의 만남으로부터 자연의 위대함과 자신의 작음을 느끼면서, 신의 존재와 미지의 힘을 감각하면서, 최소한의 도덕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270일을 견딘다. 육지에 도착하기까지 파이는 슬플 겨를도 없었다. 혼자였다면, 리처드파커라는 긴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영화는 열린 결말이다. 실제로는 동물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투이고 그 끔찍한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비유로 포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 맹수 자체가 파이 안의 동물적인 본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본성과의 팽팽한 긴장이 살아가게 한 것이라는 해석. 나는 그 비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래서 호랑이와의 동거가 그를 살렸다고. 그 긴장이 슬픔과 고통을 밀어내고 육지에 도착하게 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