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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y 13. 2016

천진한 악인들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 연극<즐거운 복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좇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은 나쁜 것인가. 약간의 위선과 적당한 거짓말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허용할 만한가. 주변에 가까운 이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이익을 좇지 않는 것을 어리석다 조롱하며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자신 역시 슬며시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세상에 악인이 많다한다. 하지만 이마에 악인이라 푯말을 붙이고 다니는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다만 그들이 살 궁리를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천진하고 명랑하게, 그리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며 타인의 슬픔에 무감한 자들이다.


천진한 악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극단 백수광부


한적한 시골, 호숫가를 둘러싸고 일곱 채의 펜션이 있다. 펜션마다 방은 넉넉하나 손님은 거의 없다. 1호 펜션에는 월남전과 한국전쟁을 치르고 퇴역한 장군과 그의 외동딸이 산다. 1호 펜션 거실엔 장군과 어린 딸이 그려진 초상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장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펜션 주인들이 몰려든다. 그들의 이력은 제각기 다양하다.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하다 내려온 50대 이혼남부터 전직 수학교사, 자서전 대필작가, 자칭 백작이라 부르는 중늙은이와 그만치 늙은 화가, 그리고 어딘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20대 건달이 그들이다. 그 중 늙은 화가는 장군과 친분이 두터워 장군이 죽자 유언장을 대행한다. 아버지를 잃은 스무 살을 갓 넘긴 장군의 딸, 복희는 착하고 선한 이웃들과 아버지 장례를 준비한다. 선량한 그들은 현충원 묘역에 안장되어야 할 장군을 호숫가에 묻어 장군을 추모하는 많은 인파를 펜션으로 불러들인다. 슬픈 복희는 그저 매일 아버지 묘에 꽃을 두러 언덕을 오르고 많은 이들이 이 홀로 남겨진 가여운 딸을 위로하고 그 슬픔을 보고자 펜션에 찾아든다.


장군을 존경하는 나팔수는 복희 곁에 남아 그녀를 위로하다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그렇듯 둘만의 세상으로 떠나려 하지만 “복희의 슬픔”으로 펜션의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은 그녀가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선의와 사랑에 등을 돌리는 것 같아 괜히 화도 난다. 초조해진 그들은 갖은 수단을 다해 그들이 떠나는 걸 막는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희와 나팔수는 낡은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려다 나팔수는 물에 빠져 죽고 복희만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다.


ⓒ극단 백수광부


복희는 이제 더욱 슬픈 복희가 되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다 가시기도 전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으니 말이다. 복희는 펜션 주인들에게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갇힌 그의 시신을 꺼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하지만 시신을 꺼내면 복희가 떠날 것이 염려된 이 선량하게 잔인한 자들은 호수 어디에 시신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거절한다. 시신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근사한 “이야기”로 팔려나간다.


비바람이 치고 천둥이 치는 어느 날, 펜션 주인들이 호숫가에 섰다. 나팔수가 빠져 죽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여섯 명의 모습이 투명한 바닥에 조각조각, 일그러진 채 흔들리는 모습이 섬뜩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다. 호수에서 나팔수의 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말이다. 나팔수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은 이들이 모여 나팔수의 죽음의 진실은 은폐한 채 어떻게 하면 더 근사하게 슬픈 “이야기”로 살을 붙일지를 논의한다. 그들이 살을 붙인 이야기가 스스로 살을 찌우고 제 몸을 키워나가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의 낄낄거림에 소름이 돋는다. 들리지 않는 나팔소리를 듣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하는 그들의 욕심은 그들의 이익으로 정당화 되며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죄의식조차 지워진다. 이미 그들에게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여전히 물속에 있는 나팔수는 아직도 뭍으로 나오지 못한 열 명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죽어버리겠다는 복희의 절규에 펜션 주인들은 의아해한다. 자신들의 돌봄과 선의에도 불구하고 왜 죽으려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 무감각함은 죄인가 아닌가. 삶을, 생명을 앞서버린 “이야기”들은 진실을 멀리하고 의도한 자들의 의지대로 방향지어진다. 그들의 죄는 의도하지 않은 척하나 천진한 미소로 타인의 슬픔을 팔아먹고 타인의 기쁨과 즐거움을 강탈한다. 그리고 그것은 악인으로 태어나 악인의 삶으로 운명 지어진 자들로부터가 아니라 삶에 찌들어 더 잘살아보려고 궁리하는 순박한 자들의 욕심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순박할 수조차 없다.


극 중의 늙은 화가는 초상화를 그린다. 처음엔 장군과 어린 딸을 그렸고 나중엔 나팔을 꼭 끌어안은 슬픈 복희의 초상을 그려 판다. 사람들은 슬픔과 아픔이 담긴 초상을 비싼 값을 주고 산다. 복희의 초상은 복희, 자신이라기보다는 슬픔으로 덧입혀진 “이야기”의 초상이다. 관객은 연극을 보러 와서 연극 속의 연극(이야기)을 마주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소소한 물건들에도 이야기를 입혀 팔아치우는 세상에 소비되지 않는 진짜 “슬픔(삶)”을 같이 울어줄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야기를 이기는 진짜 “생명”을 말이다.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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