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롱 Jun 04. 2016

언제나 가여운 것은 제물

이강백 작가, 이수인 연출, 연극 <심청>

출처 : 플레이디비


앞 못 보는 아비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그 효심에 감동하여 용왕이 심청을 연꽃에 싸 보내니, 어부들이 이 귀한 연꽃을 왕께 진상하고 꽃 속에서 나온 곱디고운 심청을 왕은 아내로 맞이한다. 왕비가 된 심청은 조선팔도의 장님(시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이 옳으나 고전의 특성을 살려 그대로 사용함)을 불러모아 잔치를 베풀고 아비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우리 고전이다. 연극 <심청>의 작가는 이 고전에 선주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수많은 어린 처녀들을 인당수로 실어 날랐을 선주는 쏙 빠져있고, 제물로 자신을 바쳐 왕비가 된 심청을 추켜세운 이 고전이 너무나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다 심청전의 배후에 선주가 있다는 확신에 다다른다. 작가는 선주가 매년 선원들의 불안을 잠재울 제2, 제3의 심청을 쉽게 구하기 위해 이 거짓이야기를 만들어 널리 퍼트렸다 가정한다.      


출처 : 플레이디비


연극 <심청>은 일평생 중국과 무역을 해온 선주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제물로 ‘간난’이라는 어린 처녀를 겉보리 스무 가마에 사온 것에서 시작한다. 아비의 술값을 위해 팔려온 간난은 도무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제물은 자발적으로 죽음에 임할 때에 효염이 있는 것이므로 선주는 간난을 극진하게 모신다. 살기위해 식음을 전폐한 간난에게 선주의 장남, 차남, 삼남이 차례로 찾아와 죽기를 설득한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선주는 왜 그런지 이번만큼은 제물을 제물로 내어주고 싶지 않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옴을 느끼니, 그동안 자신이 죽음으로 내몰았던 수많은 생명들,  그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의 감정을 알 것 같다. 간난을 놓아주면 어쩌면 자신도 죽음에서 놓일 것 만 같아 그녀를 놓아주나, 간난은 도리어 산다해도 죽음보다 잔혹한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죽기를 결심한다. 그렇게 선주 역시 자신의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출처 : 플레이디비


선주의 죽음은 동정 받을만한가

선원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숱한 어린 처녀들을 바다로 내몬 선주의 두려움은 동정 받아도 좋은가 말이다. 선주는 자신의 육체가 늙고 병들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자, 자기 앞에 놓인 타인의 죽음을 이제야 죽음으로 인식한다. 그 인식이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어서, 그가 죽지 않으려 두려움에 떨며 몸부림칠 때, 나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면서도 그의 두려움에 공감하고 싶지가 않더라. 그 자기애를 동정하는 것만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물은 그런 선주를 이해한다. 아비도 팔아버린 자신을 왕비처럼 고이 여겨준 것에, 그리고 자신을 놓아주려한 것, 그것이 설사 선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마음에 품고 갈 수 있게 해준 선주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자기 존재를 마주했다 믿는다.      


출처 : 플레이디비


언제나 가여운 것은 제물이다

제물의 비극은 제물이면서, 제물인 줄 알면서, 스스로 제물 됨을 쓸모 있는 것이라 설득하고 믿는 것이다. 정작 선주된 무리들은 선원들의 품삯을 더 얹어주기보다 겉보리 스무 가마로 처녀를 사오는 것이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들에게 제물이란 버티면 버틸수록 셈을 복잡하게 만드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이 그토록 쌓으려고 애를 쓰는 부富는 결국 장부에 적힌 숫자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 숫자의 들고남에 숱한 생명이 사라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이를 위해 제물의 마음을 구슬리려한다. 거짓이나마 살아생전 겪어볼 일 없는 융숭한 대접을 해주며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결심하게 하는 것이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이 제 맛을 내듯, 죽음이 있어야 이야기에 맛이 난다는 그들의 표현은 제물의 죽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임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한다. 작가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간난에게만 이름을 부여하는데, 간난의 죽음을 다른 숱한 죽음들 중 하나의 죽음으로 남지 못하게 하려는 작가의 위로같다. 그녀들은 제2, 제3의 제물 심청이 아니라, 간난이고, 언년이고, 삼월이다. 고전 속,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이 처녀들과 그들을 검푸른 바다로 내던진 무리들의 속내가, 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지 않은가.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그 서늘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연극은 작가의 우려와는 다르게 재미있고 독창적이었다. 극 중, 머리를 밀고 베옷을 입은 배우가 마임을 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객에게 보게 한다. 인물들의 감정이 고조될 때 그는 몸을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노를 젓고, 나비를 허공에 날게 한다. 그리고 극이 클라이맥스를 향할 때는 죽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심청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라이브로 삽입되는 코러스는 극을 해설하기도 하고, 혼자 무대에 선 인물들과 대화하고 장단 맞추며 극을 보다 더 풍자적이게 한다. 이강백 작가의 문어적 대본은 극단 떼아뜨르 봄날을 만나 강약을 잘 조정한 매혹적인 음악처럼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진한 악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