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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Jun 11. 2016

비어있지만 꽉찬 무대의 진심

민준호 연출, 연극 <나와 할아버지>


텅 빈 무대 중앙에 바퀴달린 커다란 끌 것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상자가 몇 개 가지런히 놓였다. 화려한 무대장치도, 배경도 없는 휑한 무대. 하지만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무대 속 인물들의 삶을 살 때, 객석에서 함께 그들의 시선을 좇고 행동을 좇고 그들이 쏟아내는 대사에 마음이 움직일 때, 휑하던 무대는 처음과는 다른 꽉 찬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무대 위 삶의 무게가 마치 나의 무게인 것처럼, 관객들의 마음에 일어난 울림은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잔잔히 이어진다.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는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 이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노라 선언하며 연극은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직접 뛰어들어 무대 속 ‘과거의 나’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거든다. 과거의 나(준희 분)와 할머니는 함께 끌 것에 오른다. 그 커다란 끌 것은 어느새 트럭이 되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현재의 나(작가 분)는 길을 안내하며 이야기에 끼어든다. 준희는 할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며 할머니 댁을 향해 달린다. 가는 길 내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언제 시간 내서 어디 좀 가자고 하면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다. 그렇게 도착한 할머니 댁에서 손자는 할아버지와 만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만나자마자 한바탕 말씨름이다. 

꼬장꼬장하기가 이를 데 없어 보이는 할아버지. 잠시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정말로 시간이 있으면 어디 좀 같이 가주겠냐고 묻는다. 글쓰기 소재가 궁하던 차에, 준희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소재삼을 요량으로 할머니 몰래 길을 따라 나서는데 그 가운데 할아버지를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어디로, 누구를, 왜 찾아 나서는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며 준희는 할아버지도 자신처럼 젊은 시절을 살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젊은 할아버지가 혼자서 감당해온 거친 역사와 개인사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세월을 떠올리니 어린 손자의 마음은 점점 뜨거워진다. 마치 날 때부터 늙어 있는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젊음과 삶의 무게를 마주하며 작가는 할아버지에 대해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던 그간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눈가가 붉게 번진 작가의 진솔한 고백은 결코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내면의 저릿함과 가벼운 통증을 관객에게 전한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깊어지며 무대 위의 유일한 장치인 끌 것은 트럭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국밥집으로, 국밥집에서 병원으로 변신하며 무대에 생기를 더한다. 단순히 커다랗고 단조로워 보이던 끌 것은 관객의 상상력을 무한하게 이끌어 전천후 배경이 된다. 영국의 연출가 피터 브룩은 


연극이 지닌 시공간의 제한은
오히려 연극의 무한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매력적인 가능성


이라 했는데 <나와 할아버지> 무대의 빈 여백은 오롯이 배우들의 내면과 시선에 집중하게 하는 훌륭한 무대장치가 되어 그 가능성을 체험토록 한다. 


물론 이러한 체험에는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을 오가며 탄탄하게 연기력을 쌓아온 배우들의 역할이 크다. 지나친 포장 없이 간략하고 좋은 공연을 다양한 형식으로 더 많은 관객에게 보이겠다는 극단 ‘간簡 다多’ 의 의지가 잘 녹아들어 있다. 또 연출가 민준호의 자전적 이야기의 힘이 무대에 진실함을 더했다.  

연극이 끝나갈 때 멀리서 코 훌쩍이는 소리와 눈물 훔치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마도 그것은 무대 위의 삶이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삶과 그들의 과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의 진심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워 연극을 뒤로하고 극장을 나설 때, 문득 우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진다. 

2013년 부터 매년이어온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는 지난 9일부터 오늘까지, 단 3일동안 강동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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