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롱 Aug 19. 2016

인간이 되기 위하여

고선웅 연출, 연극 <곰의 아내>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극 중 아내는 남편에게 말한다. 남편도 아내에게 말한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들의 행복이 공유될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대사. 그들은 남편이고 아내이지만, 부부이고 세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각자의 행복을 바랄 뿐 함께할 행복은 없다고 믿는다.



어린 소녀가 숲에서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은 소녀를 발견한 곰은 자신의 동굴로 소녀를 데려다가 돌본다. 소녀는 곰과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다. 곰과 사는 여자는 우연히 숲에서 삶을 포기하려는 남자를 구하고,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은 여자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기 곰을 죽이고 여자와 사내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온다. 곰과 살았던 여자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며 온 동네는 수근 대고 인간이 되기 위한 굿판을 벌인다. 하룻밤의 동침으로 자신이 구해준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여자는 그를 따라 도시로 떠난다. 가정이라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생활을 꾸려가던 중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에 점점 지쳐간다. 여자는 남편을 도우려 청소도우미를 자처하지만 인간들의 더러운 본성에 환멸을 느끼며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그녀 곁을 남자는 지키고 싶지 않다. 그의 떠날 핑계는 인간답고 싶다는 것, 인간이 되고 싶어 떠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덮던 이불은 어느새 각자의 침낭으로 변한다. 남자는 신발과 자신의 침낭을 버려둔 채 여자의 곁을 떠난다. 각자의 침낭 속에 들어간 그들은 상대의 부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가 떠난 후 에야 그 비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렇게 버려진 여자. 부른 배와 곁에 누인 두 아이와 함께 버려진 그녀 곁으로 곰이 찾아온다. 총포인지 축포인지 모를 소리가 그들을 감싸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가족이란 형식은 보기에 좋다. 그 속이 곪아 썩어도, 그들 속에 도망할 궁리만이 있어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외피를 쓰고 한자리에 있는 한 그들은 짐짓 안전하고 행복한 척, 인간다운 척 할 수 있다.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순수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이상을 좇기로 한다. 순수박물관은 그가 순수하던 시절의 감성과 연애라 불리던 것들과 첫사랑의 다른 말이다. 그녀는 그가 떠난 후 그녀가 소녀이던 시절 발목에 차던 방울을 다시 찬다. 그녀 역시 다시 소녀로 돌아가 그녀만의 순수박물관을 찾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발에 방울을 찬 여자는 나 여기에 있다고 마치 그녀의 남편에게 알리려는 듯이 방울을 울리며 독백한다. 나도 이제 당신처럼 가난하고 약해졌다고. 당신처럼 가난하고 약한 곰의 탈을 썼다고 말이다. 곰은 그녀의 방울소리를 따라 나타난듯 그렇게 그녀와 함께 그녀의 순수박물관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더 인간다운가. 인간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좇아 떠난 자의 선택인가.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간이 되어야 하나. 웅녀 설화를 모티브로 한 연극 <곰의 아내>의 곰은 말 그대로 짐승인 곰이면서, 곰의 외피를 쓴, 우리가 짐승으로 여기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내에게로 돌아온 곰은 그 외피 아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것, 최소한 짐승으로서의 도리를 품고 있다.  



고선웅 연출은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숨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뱉어 대사를 공중에 던질것을 요구한다.(일명 밀어치기 화법) 그것은 마치 대사의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 선언적 태도는 모든 대사를 꼭꼭 씹어 관객에게 내던진다. 하나의 동굴을 형상화한 무대, 동굴 벽에 그들이 내밷은 말들, 그 글들이 포개져 그 의미를 분해하고 무너뜨린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글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말들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소품들에 돋아난 풀들, 무성한 잎사귀들은 이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설화처럼 여겨지게 한다. 연출은 그저 등장시키고 관객이 보고 느끼고 자기경험으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열어둔다. 관객들은 그 창구를 통해 누군가는 희망을 읽고 누군가는 절망을 읽는다.


연출은 결론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다. 행복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우리는 각자의 사랑을, 행복을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의를 따라, 도망해도 잊을수없는 얼굴을 따라 삶을 이어가야한다. 그 삶을 이어가려는 각자의 의지가 연출이 말하는 희망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17세기 파리에서 날아온 '사랑과 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