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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Sep 19. 2016

악인은 죽지 않는다

김태형 연출, <카포네 트릴로지 : 빈디치>

출처 : (주) 아이엠픽처스


갱스터 느와르 <카포네 트릴로지(The Capone Trilogy)>는 영국 연출가 제스로 컴튼이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작품을 국내 관객들의 구미에 맞도록 각색한 작품이다. 컴튼은 한 공간을 중심으로 3가지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하고 동일한 배우들이 이 3가지 에피소드를 모두 연기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카포네> 삼부작 역시 그러하다. 국내에서도 그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의 밀도를 지켜나간다.   


카포네는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명한 마피아의 보스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 밀주와 밀수, 도박 등 수많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며 폭력과 살인을 지휘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불법으로 쌓은 부를 시카고의 정계와 경찰들을 매수하는데 쓰며 도시 전체를 지배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포네는 1932년 탈세로 수감된다. 연극은 범죄, 부패, 탐욕이 넘쳐나던 당시 시카고의 1923년, 1934년, 1943년의 각각의 사건을 렉시턴 호텔 661호라는 한 공간에 풀어놓는다.      


코메디로 설명하는 1923년 1부작 <로키>는 거액에 팔린 쇼걸 롤라 킨을 둘러싼 10명의 인물들이 거짓말과 죽음, 욕망을 교차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국면에 처하는 이야기다. 서스펜스로 설명되는 1943년 2부작 타락천사 <루시퍼>는 카포네가 수감되어 보스를 잃은 조직의 2인자 닉 니티와 그의 아내 말린의 이야기다. 그리고 하드보일드를 표방하는 1943년 3부작 복수의 화신 <빈디치>. 자신의 아내를 유린한 상사에게 처절한 복수를 선사하기 위해 적의 딸과 손을 잡는 젊은 형사의 이야기다.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 빈디치는 아내 그레이스의 시체와 함께 렉싱턴 호텔 661호에 갇혀있다. 661호는 20년 전 자신이 수사한 롤라 킨과 닉 니티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다. 아내는 그의 상사이자 경찰서장인 프랭크에게 겁탈당한 뒤 자살한다. 그런 아내의 복수를 위해 빈디치는 매일같이 몸을 단련한다. 아내의 친구이자 서장의 딸인 루시는 그의 복수를 돕겠다며 그를 찾아온다. 다른 속내가 있어 보이는 루시와의 불안한 동맹은 프랭크를 661호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프랭크를 마주한 빈디치는 그를 고이 죽일 수 없어 고문을 거듭하며 그에게 겁탈의 이유를 캐낸다. 하지만 프랭크와 루시, 그레이스, 그리고 자신마저 그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깨닫고 절규한다. 모른 체했던 진실을 마주한 빈디치는 복수를 마무리했다 믿으며 약을 털어 넣고 그레이스 옆에 자신의 몸을 누인다.      


빈디치는 그의 부인 그레이스에게, 그의 복수를 돕는 루시에게, 그리고 그의 아내를 유린한 프랭크에게 속기만 한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속인 것은 그들이 아닌 자기 자신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하는 이 도시에서 그는 마치 그가 저주하는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알려고 조차하지 않은 조금 더 착한 악인에 불과할 뿐이다.  

    

루시와 빈디치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원작과 다르게 각색되어 추가된 부분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사랑에 마음이 흔들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려 결국에 빈디치에 손에 죽임당한 루시를 보는 것이 불편해서였다. 외로운 이들에게 감정으로 사기 치는 것은 정말이지 보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당하는 쪽이 여성인 그 전형성에 약간 속이 상했다. 물론 그 성적 긴장감 덕에 연극은 보다 밀도가 짙어진 것은 사실이다, 좁디좁은 무대 위로 쏟아지던 빈디치의 독백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프랭크 밀러,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신 시티(Sin city)>를 떠오르게 했다. 그의 독백은 이것이 빈디치의 극임을, 그래서 루시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하듯 하다.     


루시도 빈디치도 죽어버린 이 무대의 승자는 누구인가. 고문으로 죽은 줄 알았던 프랭크는 극의 마지막에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저승사자처럼 몸을 일으키며 무섭고 기괴하게 웃는다. 빈디치의 무대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프랭크다. 악인은 참으로 죽지 않고 잘도 일어나 다시 미소짓는다. 그런 악의 성실함을 이길 더 큰 성실함이 간절하다. 인간성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시대는 비단 1920~40년대의 시카고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여기 이곳의 악인들은 더 잘 자고 더 잘 먹으며, 죽음 근처에 가기는커녕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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