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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Dec 01. 2016

타인의 욕망을 사는 일

테네시 윌리엄스 작, 국립극장 NT live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베니딕트 앤드루스(Benedict Andrews) 연출,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 NT Live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실험성과 작품성면에서 가장 트렌디하다 평가받고 있는 영국의 영 빅(Young Vic) 극장이 제작한 연극<욕망이란 이름의 전차>가 국립극장의 NT Live 프로그램으로 국내에 상영되었다. 이번 작품 역시 무대와 관객간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무대의 전면(全面)이 관객에게 노출되도록 한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관객의 시선은 배우가 보여주고자 하는 단면에만 머물지 않고 무대의 모든 공간에 침투하여, 신(神)과 같이 또는 함께 무대에 선 배우같이, 무대 깊숙이 파고든다. 무대의 배치와 장면이 바뀌는 순간들마저 모두 관객에게 노출되는데, 배우들은 암전되지 않은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여전한 시선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부서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청소하며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그 약간의 긴장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무대에 밀착하도록 이끌고 관객은 장면의 전환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몰락한 상류층 여성 블랑쉬는 어느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 여동생이 살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낙원'에 도착한다. 언니 블랑쉬가 남편과 농장을 잃고 상심함을 알기 때문인지, 동생 스텔라는 예고 없이 도착한 언니를 측은히 여기며 맞아준다. 충격적인 비밀을 감춘 남편의 죽음과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 자신의 형편은 잊어버린 듯한 블랑쉬는 여전히 자신의 고급스런 생활방식을 유지하려한다. 현실주의자인 제부 스탠리는 그런 처형을 이해할 수 없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블랑쉬는 그런 제부를 무시한다. 블랑쉬는 스탠리의 친구 미치와의 결혼을 통해 새 출발하려 하지만 그녀의 숨겨진 과거,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방탕한 선택을 했던 과거들이 폭로되어 결국 이별한다. 스탠리의 이 같은 폭로로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고 스텔라가 출산으로 집을 비운 사이 스탠리는 블랑쉬를 겁탈함으로 모욕을 준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미쳐버린 블랑쉬는 스탠리와 스텔라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블랑쉬는 무대 안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도덕이라는 굴레들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비밀을 감싸지 못했던 개인적인 슬픔,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했던 비윤리적인 선택들, 자신의 처지와 형편은 외면하고 허영을 버리지 못한 것, 자신의 잘못으로 고향에서 좇겨온 주제에 마치 우아하고 순결한 여인인척 연기한 가증스러운 여자라는 평가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가 당한 유린과 모욕, 치욕은 몹시도 당연한 것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제 다시 구원받기 어려운 이 여인의 슬픔이 너무 커서 자신을 집어먹어 삼킨 것만 같이 그렇게 크게 흐느꼈다. 그 장면은 마치 방금 마친 연극의 번외편 같이 마음을 쳐서 나도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우리를 울게 한 것일까. 왜 블랑쉬의 허영과 절제되지 못한 삶의 선택을 손가락질 하지 못하고 같이 울어야 했는지,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녀의 허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블랑쉬는 미치가 물어도 자신의 나이를 결코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와 무관해 보이는 하이톤의 살랑거리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려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순결하고 우아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자신은 연약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믿고 또 그렇게 보여진다. 이렇게 보여지기 위한 그녀의 애씀은 너무도 위태롭고 불안하여, 처연하고 비참하다.      

 

이렇게 보여지고자한 그녀의 허영과 욕망은 정말 그녀 자신의 욕망인가. 그녀는 왜 순결한 척 연기해야 하는가.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더럽혀진 것인가. 왜 그녀의 욕망은 허영이라 이름 붙여 유린되고, 이런 치욕을 겪어야 하는가. 그녀는 사회의 욕망을, 남성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을 마치 자신의 욕망인양, 그 욕망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이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믿어버린다. 타인의 욕망을 제 욕망으로 믿어버린 블랑쉬는 그 타인들로부터 다시 기만당하고 버려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서는 낙원에 가 닿을 수 없다. 낙원에 가 닿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으로 갈아타는 것 뿐이다.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이 땅의 많은 여인들은 이 여인의 슬픔을 타인의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울 수밖에 없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는 항상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Whoever you are,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     


라는 블랑쉬의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너무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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