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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Dec 02. 2016

누군가에게 집이 되어준다는 것

홍상수(2016),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얼마전 허핑턴포스트지에서 '버락·미셸 오바마 부부의 사랑을 담은 순간들 34'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부부의, 서로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그리고 함께함으로 더욱 의미있어진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은, 어떤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마음을 울리는 장면들이었다.


기사 바로가기 https://goo.gl/Ie47f4


Nikki Kahn/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그 뭉클하고 감동적인 순간들은, 그러나 너무도 완벽해서, 같은 세상에 살지만 여기의 나에게, 또 대부분의 많은 이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이상 같아서, 괜히 슬퍼졌다. 퇴근하고 학교 가는 길, 택시 뒷좌석에 앉아 기사를 읽는데, 라디오에서는 때 마침 김광석의 '기다려줘'가 흘러나왔다. 언젠가,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지고서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게 해줬던 노래다. 가사는 이러하다.


난 아직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대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을 찾고 있어.

그대의 슬픈 마음을 환히 비춰줄 수 있는, 변하지 않을 사랑이 되는 길을 찾고 있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다라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있는, 그대.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함을 절절하게 고백하면서, 그래서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더 절절한 부탁. 어쩌면 사랑은 누군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우리는 결국 서로가 더 편해질 길을 택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 부터, 각자의 마음 속에 뿌리깊이 막힌 편견과 이기심으로 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막연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그렇게 헤어졌다. 그는 막연한 미래를 현실로 이룬 것 같고, 나는 이제는 이런 기사로 위로 받고 또 절망하며 그저 매일 눈을 뜨면 출근 할 뿐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시절은, 일상의 귀중한 것들마저 죄다 사치같아서, 먹고 사는 일이나 시국을 논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다 가벼운 입놀림같이 여겨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미셸과 버락 오바마의 사진 속에 담긴 그것을, 우리 모두가 원한다는 걸. 너무나 원하지만 충분히 가질 수 없어서, 아니면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어서, 때때로 차라리 비웃고, 별 것 아닌것으로 치부해버리며 소중한 것이 아닌 체 한다. 이 귀한 마음들, 그리고 시간으로 견고해져서 누구도 허물 수 없는 관계는 참으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므로.


Daum 영화


사랑 이야기가 아닌 척하며(이를 테면 이것은 시간의 이야기다 라던가), 늘 사랑 이야기만을 하는 감독이 있다. 온갖 찌질한 남자들과 그들로 인해 같이 찌질해지거나 모욕을 당하는 숱한 여인들이 있는 풍경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감독, 그리고 이제는 현실로 그 찌질함을 드래그한 감독. 그의 이름은 홍상수다.  최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열여덟번째 작품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이전 작품과 어딘가 모르게 달라보인다.


화가인 영수는 민정과 연인사이다. 친구 중행은 영수를 찾아와 민정이 요전날 어느 남자와 술을 마시다 크게 싸움을 했고 동네사람들이 이걸 다봤으며 그 사실을 너만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보지는 않았단다. 그날 밤, 영수는 여자친구 민정과 그 일로 말다툼을 한다. 민정은 영수와 그 친구들이 진절머리가 난다. 당분간 서로 보지 말 것을 선언하며 영수의 집을 나온다. 다음 날부터 영수는 민정을 찾아다니지만 민정을 만날 수가 없다. 그 사이 민정은 민정을 알아보는  재영과 상원을 각각 만난다. 민정은 자신이 민정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들과 마치 처음 만난 것 처럼, 아니면 정말 처음이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몇 차례의 만남을 가진다. 그러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는다. 이 싸움은 영수와의 싸움의 발단이 된 그 싸움인지, 아니면 정말 그 사이에 일어난 싸움인지 모르겠다. 민정이 아니면서 민정과 꼭 닮은 이 여인은, 정말 좋은 남자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넋두리한다. 민정은 싸움과 곤란한 상황을 피해 들어간 한 골목에서 혼자 흐느껴 운다. 민정을 찾아헤메던 영수는 그 골목에서 드디어 민정을, 아니면 민정을 닮은 이 여인을 만난다. 민정이거나 민정을 닮은 여인이거나, 아무튼 이 여인은 영수와 처음으로 인사하고 그의 집에 함께 머문다. 그들은 그 순간이 너무나 좋고 만족스러워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어떠한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극 중 영수의 고백처럼.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을 겁니다.


사실은 오직 당신이 너무 좋다는 것. 당신이 당신이라서. 당신이 지금 내 눈앞에, 내 곁에 있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한다.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깬 영수는 침대에 앉아있다. 그의 눈은 그 너무도 좋았던 모든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말한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처럼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관객들이 몰두할 때 즈음, 민정을 닮은 여인이 등장한다. 냉장고에서 아주 아주 차가워진 수박을 들고, 그에게 한조각, 자신의 입에 한조각씩을 넣으며 연신 시원하다고 말한다.


영수의 방은 좁고 답답하다. 어디 시원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이 하나 없다. 아니면 아주 작은 창이 어딘가에 있다. 마치 전혀 다른 곳, 이 세상의 곳이 아닌 것 같은 그의 방에는 침대와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굵은 양초가 있다. 그 이상한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눈에 초점마저 잃고 어디 먼 곳을 보는 것 같던 영수에게 전해진 그 차가운 수박은, 이 모호하고 확실하지 않아 어딘지 불안한 이 공간에 몹시도 명확하고 분명한 감각을 선사한다. 아주 아주 차갑고 시원한 이 수박이 주는 감각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 영수 자신과 민정을 닮은 여인과 관객에게,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볼을 꼬집어 주는 것과 같다. 수박의 시원한 맛의 감각은 이것이 현실의 것임을 알게 한다.


Daum 영화


민정이 거짓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민정이 아니라고 우기는 여인은 사실 민정이고, 다만 민정이기를 원하지 않아서 아닌 체 한 거라고 말이다. 민정은 왜 거짓말을 한 것일까. 민정의 거짓말은 너무도 거짓말 같아서 차라리 믿게 된다. 설마 그 정도의 거짓을 말하랴 싶어지는 것이다. 대개의 거짓말의 기능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거나, 도망하고 싶거나, 결국에는 부정하고 싶은, 그것이 자기자신이든, 주변의 조건과 환경이든, 부정하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다. 민정은 연남동의 인간들이 지겨운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연남동에서 오며가며 사람들을 방아찧는 인간들 보란듯이 웃고 떠드는지 모르겠다. 멋대로들 생각하라고, 그 생각이 나 자신이 될 수 는 없다고 스스로 선언하면서. 모든 지겨운 관계들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민정은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나 자신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시험해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에 있을 법한 통쾌한 상상이 스크린에 실현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사랑받나. 상대에게 고임받을 만한 외모를 지녀서, 대단한 스펙이 있어서,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서 일까. 당신이 아는 나는 내가 꾸며낸 나인지, 당신에게 맞춰진 나인지, 그냥 나인지 알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떤 나를 사랑할 것인가. 민정은 어쩌면 망가져버렸다고 믿고 있는 현실로 부터,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 욕망을 품고 있는 나 자신 그대로 인정 받고 싶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제대로 보아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므로, 그녀는 계속 넉두리를 해댄다. 한번도 최고의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다고.


이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는 다르다. 마치 이 영화를 통해 현재 자신의 스캔들을 해명하는 것 같이. 다들 말들 뿐이지 사랑을 모른다고 따지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만이 진짜인 어떤 사랑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인지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본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라는 제목은 마치 영문을 지은 후에 따온 제목 같다. 존재냐, 소유냐 라는 고전적인 질문 앞에 홍상수는 존재와 소유를 아우르는 당신과 나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는 답변을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다 한다. 존재와 소유를 아우르는 나 자신을, 적어도 한 사람에게, 이해하고 싶고 알고 싶은 내 앞의 누군가에게, 나역시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실현될 때, 우리는 위로 받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 감독에게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이 뭔가 도덕적이지 못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그 수박의 감각마냥 내게도 그 위로는 제법 선명하게 다가와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으로서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 실현된 곳, 그곳이 어디든 그 곳이 집이 된다. 물론 처음 누군가를 알게 될 때의 그 알고자 하는 욕망은 꽤나 영원할 것만 같지만 결국 운이 좋은 몇몇 만이 시간을 양분 삼아 자신들의 집을 유지한다는 걸 안다. 미셸에게 오바마가, 오바마에게 미셸이 집이 되어주는 것 같은 일은 거의 동화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다짐해본다 ㅠ) 삐져나온 뱃살로, 엉클어진 머리로, 가끔 실수로 내뱉는 모진 말로, 어떤 실패와 가난도, 그 사람의 속 깊은 곳까지, 그 영혼까지 매도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 믿음에 거한다는 신뢰가 동화를 현실로 끌어낸다.


좀 쌩뚱 맞은데, <레미제라블> OST 중  'Bring Him Home'을 이야기 하며 끝을 맺고 싶다. 이 노래는 장발장이 딸의 남자친구를 살려달라며 부르는 노래인데, 요새 종종 입밖으로 새어 나오곤 한다. 그중 처음 가사가 이렇다.


God on high

Hear my prayer

In my need

You have always been there

He is young

He's afraid

Let him rest

Heaven blessed.

Bring him home

Bring him home

Bring him home.


기도없이, 신의 긍휼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겨워서, 저절로 노래가 입술을 타고 흐른다. 이 사랑없는 세상에, 노동과 허무만이 있는 이땅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다만 발을 딪고 살, 버텨낼 희망을, 그런 집을 우리에게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홍상수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기도로 끝을 맺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지만, 어쨌든,


God on high, Let us live!






출처: 거의 문화잡지 <놀다가,> 9호(2016.12.2)  https://issuu.com/noldaga/docs/__________9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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