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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Feb 20. 2017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관하여

연출 고선웅,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출처 : 국립극단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영공 때, 재상 조순은 어진 인품과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정으로 주변에 그의 덕을 입은 자들이 많았다. 그의 아들 조삭은 영공의 누이와 혼인하여 태중에 아이가 있었고, 그가 가까이 하며 돕던 정영의 처 역시 느즈막이 아들을 임신하여 두 가정에 기쁨이 있었다. 조순을 시기하던 간신, 무관 도안고는 호시탐탐 그를 쓰러뜨릴 기회를 옅보다 영공이 하사한 영견(靈犬)을 훈련시켜 조순을 역적으로 몰아 세운다. 간언에 넘어간 영공은 조순의 일가 친척 300명을 몰살 할 것을 명하고 조삭과 공주만을 살려두라한다. 도안고의 계략에 의해 조삭마저 죽고 공주는 냉궁에 갇힌다. 조삭은 죽기 전, 아이의 이름을 조씨고아라 짓고 가문의 치욕을 갚을 것을 유언한다.


공주는 자신과 아이에게 약을 지어주려 냉궁에 방문한 정영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자진한다. 조순에게 입은 은혜때문에 차마 공주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정영은 공주와 장군 한궐의 희생으로 궁을 빠져나온다. 조씨고아를 찾기위해 마을이 온통 뒤짚히자 정영은 조순의 지기인 공손저구를 찾아간다. 고아를 맡기고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죽기를 원했던 정영에게 공손저구는 오히려 자신이 그의 아이 정발과 죽겠다 한다. 도안고는 정발을 조씨고아로 알고 죽인다. 공손저구는 그 죽음을 애통해 하며 죽고, 정영의 처도 제 아이가 죽은 슬픔을 못이겨 따라 죽는다.


조씨고아는 정발의 이름으로 정영의 손에 큰다. 정영을 제 편으로 믿은 도안고는 정발을 양아들로 맞아 무예를 가르치니 어느사이 스무살이 된다. 정영은 그제서야 피맺힌 조씨일가의 불행과 지난 시간을 일깨우며 고아의 복수가 실행되어야 함을 알린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을 인정한 고아는 양부 도안고의 간악함을 영공에게 알려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복수에 성공한 고아와 이제 삶의 방향을 잃고, 죽어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자신의 선택에 절망한 정영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출처 : 국립극단


연극<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13세기 중국 원나라 기군상의 잡극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한다. 탄식하게 되는 것은, 원작이 쓰인 13세기에도, 원작의 배경이 되는 기원전 770년 춘추전국시대에도, 악인은 여전히 악을 심고, 그 와중에 기회를 틈타 호의호식 하는 자들은 늘 존재하며, 권력있는 자들은 악에 놀아나 제멋대로 힘을 과시하니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이 라는 사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천년이 넘게 흘렀건만, 간신배들이 나라를 농단하고 어진이들을 음해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협하는 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참으로 슬프기 그지 없다. 다만 궁금한 것은 어째서 정영은 조순일가의 억울함에 등돌리지 않고, 뿐만아니라 제 가족까지 희생해가며 약속을 지켰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가능한 것인가, 이렇게까지 하여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사실 그에게 명쾌한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절박한 순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이에게 등을 돌리지 못했던 것이며, 목숨으로써 그 부탁에 신의와 도의를 실어낸 많은 이들의 선택을 헛되게 하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결국 그것이 그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약속이 지켜짐으로써 다른 생명이 산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입는 은혜를 기억했고 은혜를 갚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꼭 해야하는 일로 여겼다. 나보다 더 큰 억울함을 겪은 이를 돕는 것,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행했다.


출처 : 국립극단


뭐든지 가능한 시대,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좀처럼 없다. 내가 가장 억울하며, 나의 아픔이 가장 크고, 나의 것이 가장 귀해서,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 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그다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한 그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너무도 귀하게 여겨진다. 다만 그 선택의 끝에 있는 것이 복수여서, 그렇게 완수된 복수 이후에 그에게 남겨진 것은, 등돌린 자신의 처와 아이, 복수만을 생각하며 보낸 20년과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허탈함 뿐인지라, 보는 관객들도 이 비극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무대는 줄곧 비어있다. 높은 천장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무대 장치들이 매달려있다. 장치들은 하늘에서 땅에서 내려왔다 올라왔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는 무대에서 이내 사라진다. 무대를 감싸는 것은 긴 장막 뿐, 홀로 남겨진 정영의 허한 마음이 반영된 듯 무대는 텅 비어있다. 그저 정영을 위로하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본 관객과 그 슬픔에 개입하는 묵자(배우들의 죽음과 퇴장을 알리며 요소요소에 개입하는 자) 뿐이다. 모든 희생을 치루고서 이룬 삶의 끝에서 여전히 홀로 설때 그것은 참으로 비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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