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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04. 2017

무대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김승철 연출, 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전국 곳곳에서 한우의 소뿔이 당수치기로 잘려나간 사건이 벌어진다. 형사 마귀량과 옹순경의 수사가 한창인 가운데 수사 진척을 위해 형사 강백호가 파견된다. 난리법석을 피우며 용의자의 자백을 거의 받아내려는 찰나, 이 모든 것이 무대에 올리기 위한 연극임을 연출자와 작가의 등장을 통해 알게 된다. 바로 그때 극 중 강백호와 사이가 좋지 않던 강신도가 내부 인물에 의해 죽임 당했음이 밝혀지고 사건을 취조하러 수사관이 등장한다. 수사관은 무대 위의 모든 인물을 용의 선상에 올려 거친 취조를 시작한다. 취조에 지쳐갈 즈음 객석에서 크게 박수를 치며 새로운 수사관이 등장하는데, 이로써 다시금 이 모든 것, 연출과 작가 그리고 마구 취조를 해대던 수사관마저 무대 위에 오른 배우임이 밝혀진다. 새롭게 등장한 수사관은 지금 현실에서 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과 꼭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범인을 잡기위해 자신이 왔노라고 선언하며 더욱 더 거친 취조를 시작한다.


출처 : 남산예술센터


극중극중극의 3단계 액자구성의 이 연극은 무협액션판타지를 표방하는 연극답게 과장된 연기, 현란한 군무와 노래, 현장의 밴드가 들려주는 생생한 음악으로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계속해서 관객을 새로운 사건의 국면으로 몰아넣는다. 연극배우들은 당수치기로 소뿔을 자른 선생, 이름은 있으나 누구도 본 적 없는 그 선생을 찾으려 애쓴다. 현실은 다르다. 정말 소뿔을 자른 선생을 잡고자 왔다는 새로운 수사관은 용의자를 잡기보다는 연극의 결말을 바꿈으로써 여론을 잠재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극 중 대사처럼 “속이는 놈은 원래 처음부터 속이는 것”이라서 실제 범인을 잡는 것보다 범인이 잡혔다는 사실(그것이 그저 연극일지라도)을 현실세계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더 많은 열정을 기울인다.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수사관의 어이없는 요구와 강압에 연출과 배우들은 새롭게 각색된 이야기를 연기하게 된다. 연극 속의 연극마저 조작하려는 현실 권력의 대처법은 연극이 현실을 침범할 거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연극에 영향을 주는 것이 현실인지, 연극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이 현실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쉬운 방법으로 “조작”을 택한다. 극 중 연출가는 현실의 수사관으로부터 그의 고유 권한인 “큐” 사인sign 마저 빼앗긴다. 황망한 표정의 연출가를 뒤로 하고 수사관은 연극의 시작을 재촉한다.


큐 사인이 떨어지고 각색된 무대 위에서 강백호는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 선생’을 만난다. 선생은 제자(강백호는 사실 그의 제자다)를 대면하며 “죽을 수 있을 때 죽어야 비참해지지 않고 또 죽지 않아야 비극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며 대결을 이어간다. 강백호는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에 놓인 그의 선생에게 묻는다. 하필 왜 다른 무엇도 아닌 소뿔이냐고 말이다. 선생은 소뿔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 그것을 대체할 뿐이라고 답한다. 무엇을 내리쳤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부터 누가 무엇을 얻는가가 더 중요한 거라고 말이다. 조작된 무대의 강백호는 실체 없는 것을 좇아 쉴 새 없이 달린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이제 현실의 그 사람, 진짜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 선생’을 잡으러 무대 밖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 모든 관객을 등지고 수사관을 향해 소리치며 현실로 나아간다.


출처 : 남산예술센터


무대 위의 배우들은 과장된 연기로 그들이 하는 일이 “연기”이며 그들이 선 곳은 “연극의 무대”임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당하는 억압과 답답한 심정은 우리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연기가 과장될수록 그들이 감당하는 조작된 진실의 무게는 무대에 현실감을 더한다. 그리고 그들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연극적인 진실에 관객은 혼란스럽다. 과장되었으나 몹시도 현실적인 무대 속에는 사실 현실이 없다. 몹시 진지하지만 지극히 연극적이어서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알기 원하는 진실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경계를 허물고 “진실”에 닿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을 가장한 거짓이든 연극을 가장한 현실이든 우리는 그 진실을 알기 위해 그리고 행동하기 위해 강백호가 그랬듯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고 연극은 말한다.


남산예술센터의 입구를 들어설 때 가장 먼저 관객은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을 만난다. 처음 극장을 들어설 때 미심쩍던 그 라인은 관객에게 당신이 지금 하나의 사건에 참여하고 이제 막 현실에 복귀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현실로 나온 강백호는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관객들을 연극의 일부로 참여하게 하는 연출의 섬세함이 즐겁다.



*2014년 남산예술센터에 올랐던 김승철 연출의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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