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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Mar 06. 2017

삶을 가로지르는 소리의 여운

창작뮤지컬 <서편제>


“언젠간 알 게다

모든 건 시간이 알게 할 게다


시간이 가면 모든 건 제자리로

시간이 가면 모든 건 잊혀지리”


뮤지컬 <서편제>의 ‘시간이 가면’의 가사는 그렇게 읊조린다. 시간이 가면 알게 될 거라고, 시간지나면 잊을 것은 잊히고 모든 건 다시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읊조리는 유봉의 눈빛에는 여전히 슬픔이 가득하고 그 목소리에는 아픔이 배어 있다. 실은 잊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번 각인된 슬픔은 가슴 한 구석에 조용히 쌓여 단단해지다 그 구석이 제 집인 양 자리를 잡아버린다. 만나고 헤어지는 삶의 여정에서 한번 배인 슬픔은 마치 처음부터 가슴 한편에 살았던 것처럼 ‘시간이 가면’ 익숙해져 그렇게 함께 살아진다. 원래 제 가슴의 모양은 잊은 채로, 소리꾼의 한恨이란 원망과 슬픔을 넘어 시간에 익숙해져 감각이 무뎌져 버린 ‘슬픔의 체념’인지도 모르겠다.


故 이청준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윤일상 작곡, 조광화 극본, 이지나 연출, 김문정 음악감독, 남문정의 안무로 2010년 초연, 2012년 재연 이후 2년 만에 <서편제>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송화 役에는 이자람, 차지연, 장은아가 동호 役은 마이클리, 송용진, 지오가, 유봉 役 은 서범석, 양준모, 동호母 役은 김윤지가 맡았다. 소설의 내용처럼 어린 송화와 동호는 유봉을 따라 소릿길에 오르고 그렇게 유랑하며 유봉은 늙고 송화와 동호는 자란다. 그들의 소릿길은 시간과 함께 그 길이 갈리니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는, 그 속에 그리움과 슬픔이 쌓인다.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울림과 배우들의 혼이 담긴 소리, 군무의 여운은 이미 다 자라버린 관객들이 미처 곱씹지 못하고 흘려버린 각자의 애환과 애잔함에 붙들리게 만든다. 무대 위의 시간은 현재와 과거를 가로질러 어린 동호와 다 큰 송화가 손을 맞잡고 다 큰 동호와 어린 송화가 함께한다. 늘 마음으로 과거의 어린 동호에 매인 송화와 어린 누이 송화에 묶여 있는 다 자란 동호는 스스로 자유롭기를 포기하고 서로에게 매여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길을 굽히지 않고 홀로 나아간다.


객석에 앉아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그들 가슴에 안은 채 자신의 길을 오롯이 가는 인물들을 보고 있자니, 삶의 작은 슬픔도 견디는 것이 버거워 피하려 하는, 아픔을 품는 것이 어색해 제대로 아파하지도 못한 채로 시간을 계수하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인생은 즐거워야 하고 기쁨이 넘쳐야 해서 살아가는 수고와 일상의 피로마저 외면한 채로 기쁨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현실. 사는 게 고단하여 즐거움만을 좇게 된 것인지, 즐거움만 좇다보니 제대로 슬퍼할 줄도, 삶을 삶으로 들여다 볼 줄도, 시간을 진정으로 살아낼 줄도 몰라버리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극이 주는 여운餘韻이다. 아직도 마음에 울림이 가시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 울림은 무대에서 시각적으로도 실현된다. 소리의 여운은 무대 위 공간에서 번져 내 눈 앞에 들어차더니 이내 마음속을 파고든다. 막이 내리고 난 뒤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엄마와 유봉의 여운으로 살아가는 송화와 동호처럼, 앞서 살다간 이가 남긴 여운으로, 그 위로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송화의 테마곡 ‘살다보면’은 노래한다.


“혼자라 슬퍼하진 않아

돌아가신 엄마 말하길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그 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아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중얼거려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살다보면, 시간을 견디고 슬픔을 끌어안고 살다보면, 마치 엄마가 그랬듯, 엄마 품이 그러했듯, 바람도 달빛도 따스하게 우리를 품어줌을 알게 된다. 세상에 배인 사랑과 위로를 살다보면 알게 될 거라고 송화는 엄마의 노래를 따라 다시 노래한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요즘, 소소한 일상의 웃음마저 죄스러워 머리 둘 곳을 잃어버린 가여운 지금의 우리는 더 깊이 슬퍼하고 더 깊이 울고, 아픔을 껴안고 이 애통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이 땅이 주는 위로가 우리에게 닿을 때까지 더 깊이 슬퍼하자.


*2014년 유니버설아트센터 이지나 연출, 윤일상 작곡 창작뮤지컬 <서편제> 리뷰, 애정하는 이자람 님을 따라가다가 만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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