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봄의 향기, 쑥
육수를 먼저 만들도록 하자. 아니 파스타 말건데 웬 국물이냐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육수는 졸이면 소스가 된다. 그게 맛이 좋냐, 나쁘냐의 문제일 뿐이다. 토마토나 크림파스타의 맛이 소스 맛이듯, 봉골레나 알리오 올리오 같은 오일 베이스 파스타의 경우도 맛을 결정짓는 것은 소스다.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지만,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기 위해 넉넉한 올리브 오일에 마늘과 페퍼론치노와 파슬리를 넣고 나중에 한 국자 넣는 면수가 합쳐진 것이 ‘소스’였던 것이다. 결국 명칭의 문제이지 구조는 똑같다.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요리도 용어 자체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안목과 실력이 생긴다.
아무튼 성공적인 오늘의 파스타를 위해서는, 다가올 늦봄 산란기를 위해 한껏 벌크업 중인 싱싱한 조개에서 맛있는 육수를 뽑아내는 것이 포인트이다. 조개는 어떤 것을 써도 좋은데 가능하면 다양한 품목을 갖춘 전통시장에서 아주머니들과 실랑이도 해가며 이것저것 물어보도록 하자. 지금 어떤 조개가 제철인지, 가격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개의 종류에 따라서 맛의 뉘앙스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요리의 재미이다. 보통은 바지락이나 모시조개를 사용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살을 발라먹는 재미가 있는 통통한 대합으로 만든 봉골레를 좋아한다.
육수는 완성 후 체에 거를 예정이므로 재료들의 모양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나, 맛과 향을 효율적으로 뽑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결국 모양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팬에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른 후 마늘 서 너 쪽을 칼등으로 빻아 마늘이 가진 즙과 향이 분출된 상태로 넣고 약불에 올린다. 여기서 약불이 중요한데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은 마늘을 익혀서 먹기 위함이 아닌, 오일에 마늘의 향을 빼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물이나 지방 등의 액체에 향을 입히는 과정을 “인퓨전”이라고 한다.
약불에서 천천히 향을 내어주는 마늘을 관찰하면서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쑥 한 줌을 넉넉히 손으로 마구 뜯어 넣어주자. 이내 구수한 마늘과 쑥의 향긋함이 진동한다. 마늘과 쑥만 주어졌더라도 올리브 오일 정도만 같이 줬더라면 웅녀도 동굴에서 100일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깨끗이 해감한 조개와 화이트 와인 한 컵을 넉넉히 넣고 뚜껑을 덮는다. 조개들이 모두 입을 벌리면 완성이다. 체에 잘 밭쳐 깨끗한 육수를 조심히 모아두고, 조개들만 따로 모아 살을 발라낸다. 지금 맛보는 풍성한 육수가 더욱 진하게 농축되고 전분과 엉켜 파스타를 코팅함으로써 맛을 결정짓는다. 이 과정에서 페퍼론치노 등 오늘의 요리사가 원하는 어떠한 허브나 향 물질을 활용할 수 있다.
모든 파스타 조리의 핵심은 면을 삶을 때 충분한 소금을 넣는 것이다. 소금은 종류에 상관없이 가장 저렴하고 깨끗한 소금을 쓰면 되는데 생각보다 꽤 넣어야 한다. 소금을 완전히 녹인 물이 짜다고 느껴지기 바로 직전 단계, ‘간간한’ 수준이어야 한다. 퇴마의식을 치르려는 게 아닌 이상, 한강물에 한 스푼 대충 던져 넣는 소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파스타는 면 요리다. 사용하게 될 소스와 완성될 요리의 최종 염도를 고려해 소금 양을 조절해야 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파스타 자체에 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예외가 없다. 주재료를 머금은 소스가 가장 큰 주장을 하되, 그 안에서 면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소금을 통해서 낸다. 짠맛을 오로지 소스 혼자서 해결하도록 둔다면 결과적으로 밍밍한 면에 짠 소스가 묻은 구조가 되는데, 최종적인 맛에서 면과 소스가 따로 노는 느낌을 준다. 각각의 요소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조화로운 맛을 낸다.
마침 계량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자. 가끔 요리를 좀 한다는 분들도 계량 자체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비단 파스타 삶을 물에 넣는 소금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레시피는 어떤 누군가가 ‘본인의 생각’대로 만든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무게를 달아서 레시피를 짜야하는 경우는 제과나 제빵처럼 특정 재료가 결과물의 구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또는 이미 완벽하게 설계되어 변화의 여지없이 레스토랑이나 공장에서 대용량으로 일정한 맛을 내야 하는 경우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리의 가장 큰 적은 스킬이나 경험부족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다. 몇 번의 실패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겁먹지 말고 여러 번 해보면서 본인의 간과 감을 동시에 찾아가면 된다. 전문가랍시고 떠드는 타인의 손에 당신의 선호를 함부로 맡기지 말자. 우리네 인생처럼 당신이 내고자 하는 맛은 오롯이 당신의 것이다. 대신 모든 순간 반드시 맛을 보는 습관을 들이자.
이제 짭짤한 물이 팔팔 끓으면 면을 넣고 익히는데 파스타 봉지에 시간이 쓰여 있기는 하나, 아무도 시간까지 재가면서 라면을 끓이지 않듯 파스타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라면 끓이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파스타 좀 씹어보신 분들은 당연히 소위 면 내부에 약간의 단단함이 살아있는 ‘알 덴테’를 주장하시겠지만, 치아가 약해 퍼진 라면을 드시는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파스타의 추억으로 남을 위험이 있다. 기호와 상황에 맞게 익히면 된다. 보통 꼬들한 라면을 선호하듯 개인적으로도 언제나 알 덴테를 목표로 하긴 한다.
파스타가 원하는 익기로 달려가고 있다면, 이제 준비된 모든 재료들이 총 출동해 피날레를 완성시킬 순간이다. 이번에는 마늘을 얇은 절편으로 원하는 만큼 썰고 쑥의 연한 이파리 부분만을 골라 잘게 다려준다. 올리브 오일을 넉넉하게 뿌린 팬을 중불로 올리고 마늘을 색이 살짝 변할 정도로 익으면 다진 쑥을 바로 넣는다. 육수에서 향을 빼는 과정과 원리는 같으나, 지금 이 순간은 재료들이 가진 향의 생동감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절대로 태워선 안 된다.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조개 육수를 여기다 붓는다. 신선한 조개 육수의 감칠맛과 올리브 오일의 향긋함, 마늘과 쑥의 생동감이 합쳐진 오늘의 소스가 준비되었다.
여기에 알맞게 익은 파스타를 건져 넣는다. 이제 육수와 오일, 전분을 방출하고 있는 파스타를 하나의 요리로 버무려야 한다. 이 과정을 이태리 본국 용어로는 ‘만테카레’라고 한다는데, 이름 자체보다 원리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물과 기름, 두 이질적인 액체를 전분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결합된 소스를 만드는 ‘유화’의 과정이다. 이 유화의 과정에서 유의할 점은 높은 온도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수가 자작자작 줄어드는 게 보이면 불을 끈다. 아직 뜨거운 팬에서 소스는 증발하고 있고, 흔히 tv에서 보던 요리사들처럼 팬을 ‘돌리기’ 시작하면 온도가 떨어진다. 소스와 면이 함께 부딪히고 섞이는 일련의 과정들이 합쳐서 흥건하던 소스는 어느새 파스타와 찰싹 붙는 상태가 된다. 오일 파스타는 잔치국수나 우동이 아니다. 공들여 만든 귀한 육수와 파스타 면을 한 몸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크림이나 토마토 파스타의 경우 소스를 ‘묻히는’ 것인 반면, 오일 파스타는 이 유화를 통해 소스를 면에 ‘붙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말은 쉽지만 맛있는 오일 파스타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맛있는 육수가 준비되고 유화의 원리만 잘 이해한 상태로 몇 번 시도해 본다면, 훌륭한 봉골레를 먹기 위해 굳이 한남동에서 거금을 지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파스타는 원하는 접시에 소복이 담고 조갯살과 약간의 쑥을 올려 재료들의 정체를 보여줌으로써 장식한다. 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질 좋은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로 광택과 향을 더해준다. 언뜻 보면 별 들어간 것 없는 단순한 파스타처럼 보이지만 맛보면 응축된 조개의 감칠맛과 간이 잘 배어 씹을수록 나오는 면의 고소함, 올리브 오일과 갓 올라온 봄 쑥이 뿜어내는 허브향의 조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플레이팅이나 보이는 재료들 자체보다 “별로 들어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뭐 이렇게 맛있냐”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외형보다 맛의 강도와 균형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자.
기획 의도
한국에서 구하기도 힘든 비싼 생 파슬리 대신, 다가오는 봄을 상징하는 대표 허브인 쑥을 사용했다. 보통은 파나 쑥갓 정도가 함께하는 조개탕에 종종 대신 쑥이 들어가곤 하는데 이 조합에 착안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봉골레 파스타에 한식적 뉘앙스가 풍기는 조합을 구현함으로써 레시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조리의 원리와 향을 가진 재료들의 조화라는 것. 고정관념을 깨고 조개와 어울리는 제철 허브라면 본인의 창의성을 발휘해 무엇이든 시도해 보는 것을 권한다.
포인트
1. 오일베이스 파스타의 맛도 사실은 소스의 맛이다. 소스는 육수로부터 시작한다.
2. 향을 뽑아내는 ‘인퓨전’ 과정은 반드시 ‘약불’로 한다.
3. 파스타는 ‘면’ 요리다. 소금 간을 확실히 하라.
4. 오일 파스타는 ‘유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불을 꺼라. 그리고 연습이 필요하다.
5. 제철에 목소리를 내는 재료들을 살펴보고 조합해 보자.
6. 레시피는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계량 자체보다 조리의 원리와 과정을 구조적으로 이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