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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Dec 04. 2017

휴가를 떠나듯 제주로 떠나다

"아직 일곱살이잖아. 갑자기 왜?", "뭐할 건데?". 육아휴직을 쓴다는 내게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아이랑 마음껏 놀려고."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갸웃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답은 늘 자신 있게 했지만 나 역시 많이 불안했다. 아이랑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늘 바쁘게만 살았던 내가 느긋한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소파에 누워 TV만 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게으를 땐 한없이 게으른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2001년 한 달 동안 유럽을 떠돌며 사법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003년 서해바다를 다녀와서 사법고시 준비를 그만뒀다. 2008년 스페인을 여행하며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2009년 남자 친구와 설악산 여행을 하며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겠구나 생각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여행이 함께 했다. 육아휴직을 결심하는데도 올해 7월의 스위스 여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내게 주어진 277일의 휴직 기간을 잘 보내기 위해서도 여행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여행은 싫었다. 느긋하다는 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여행이었으면 했다. 시간에 치여 목적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여행보다 일상을 사는 것과 같은 느린 여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제주 한 달 살기를 떠올렸다. 언제 떠날까. 휴가를 떠나듯 가고 싶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삶이 익숙해지기 전에 새로운 삶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여유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아이와는 어떻게 놀아야 행복할지 답이 궁금했다. 


금요일 육아휴직 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토요일 바로 제주로 떠났다. 계획대로 휴가를 떠나듯 제주로 간 거다. 유치원 등하원을 시키고 가족들의 저녁을 차리고 무언가는 해야 하는 적당한 긴장 속의 여유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내 앞에 있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이전의 삶과는 180도 달랐다. 며칠 뒤에 끝나는 일반적인 휴가도 아니었다. 급격한 삶의 변화가 277일 동안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느긋함은 저절로 따라왔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게 놓인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마음이 먼저 느끼고 몸이 자연스레 따라오며 제주 한 달은 내게 느리게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몇 시에는 숙소에서 나가야 해."가 아니라 아이가 나가고 싶은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아이를 바라보며 초조해하는 대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시간을 보냈다. "몇 시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 대신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를 기다렸다. 한 장소에서 여섯 시간을 머무를 때도 아이를 재촉함 없이 따라다녔다.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몇 번을 반복하며 구경하는 아이의 행동에서 나 역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행에서는 늘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남들에게도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한 달 살기를 떠나면서도 꽤 많은 옷을 챙겼다. 습도가 높아 빨래가 잘 마르지 않으면 초조했고 여럿이 함께 쓰는 건조대가 꽉 차 있으면 불안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꽉 찬 건조대를 무심히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빨지 못한 옷이 쌓여있어도 날씨가 좋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남들의 시선이 의미 없음을 그저 편한 옷이면 다 괜찮음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느끼게 된 거다. 오늘 꼭 해야만 하는 빨래가 아니라 날씨도 건조대도 차례가 되었을 때 하게 되는 빨래는 노동이 아닌 낭만이었다. 


느긋해진 나는 더 이상 엄한 엄마가 아니었다. "안돼."라는 말을 아이에게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해.",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아이의 놀이를 멈추게 하는 말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더 놀고 싶다고 하면 더 놀라고 했고 공주놀이를 하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공주놀이를 함께 했다. 아이에게만 금기를 거둔 것이 아니다. 어른이라서 가지게 되는 체면 역시 나도 내려놓았다. 길 한가운데서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공주가 됐다 마녀가 됐다 로봇이 됐다 하면서 일곱살 마음으로 같이 놀았다. 


제주 한 달은 육아휴직 시작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시회를 가야지, 서점을 가야지, 산책을 해야지 하는 계획 없이도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됐다. 아이와 상하관계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 친구 같은 엄마로 아이와 즐겁게 놀 수 있는 법을 배웠다. 거기에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요리였던 내가 요리에 스트레스받지 않게 됐다. 시간이 걸리면 걸리는 대로 맛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마음을 담은 것에 만족한다. 꼭 내 손으로 요리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도 버렸다. 하기 싫을 때는 외식하는 것에 미안해하지 않게 됐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사는 법을 깨달았다고 할까. 


해야만 하는 것이 참 많았던 나는 매 시간 다이어리 빼곡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했는지 점검했었다. 오늘 하루는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나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스트레스가 된다면 문제가 된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는 자책은 나를 갉아먹고 내 주변 사람들 마음도 갉아먹기 때문이다. 이제는 계획을 세워도 빈 공간을 많이 남겨둔다. 느긋한 기다림이 내게 주는 여유와 행복을 안다. 내가 평온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온함을 배운 나는 남은 육아휴직 기간도 느긋하게 보낼 예정이다. 제주 한 달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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