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을 한 뒤 나는 늘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화려한 에스닉 원피스를 입을 때도 깨끗한 흰 남방을 입을 때도 보라색 블라우스를 입을 때도 베이지 니트를 입을 때도 가방은 늘 같다. 빳빳한 면으로 된 가방이다. 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가방이라서 보라색 블라우스에는 어울리지 않음도 알고, 스트라이프 가방이 에스닉 원피스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안다. 패션의 완성은 가방이라는데 개의치 않는다. 가죽보다는 무게가 덜 나가는 면 소재. 가벼우니 그걸로 됐다.
가방에는 많은 물건이 들어있다. 책 1권, 노트북, 마우스, 화장품 파우치, 작은 우산, 수첩, 볼펜, 지갑, 핸드폰. 거기에 요즘은 텀블러가 더해졌다. 게다가 나는 버스로 출근을 하고 1시간 남짓한 거리를 대부분 서서 간다. 손목이나 어깨에 걸쳐질 가방의 무게가 버겁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지를 못한다. 책은 읽어야 하니까, 노트북은 잠깐 시간이 날 때 글을 써야 하니까, 피곤과 나이 듦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해야 하니까, 우산으로 햇빛은 막고 갑작스러운 소나기도 피해야 하니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을 수첩에 메모해야 하니까. 지갑과 핸드폰은 빠질 수가 없고. 가벼운 가방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무엇을 빼야 할지 고민을 해도 션찮은데 텀블러를 더했다. 출근길마다 마시는 커피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500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플라스틱 컵을 쓰는 삶.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머그컵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 마시는데 길어야 15분. 9시인 출근시간보다 한참 앞서 사무실에 도착하는데 고작 15분 더 쓴다고 큰일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 15분 동안 커피와 함께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번 상황이 여유롭지는 못했다. 15분도 누리지 못한 채 사무실로 바로 가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텀블러가 필요했다.
며칠 전 반가운 후배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후배의 손에는 텀블러가 들려 있었다. 나보다 한수 위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역시 빼놓지 않고 마시게 되는 커피. 보통 점심 때는 부른 배에 커피가 빨리 마셔지지도 않고 긴 시간도 가질 수 없어 플라스틱 컵을 찾았는데 이날은 후배의 텀블러와 보조를 맞췄다. 머그컵에 커피를 마셨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잔에 아직 커피는 남았지만 남은 커피를 아쉬워하지 않고 일어섰다. 플라스틱 컵을 쓰는 것보다 커피 조금 남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믿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나도 후배처럼 텀블러를 가지고 나오겠노라 다짐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후배에게 물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테이크아웃 컵 막 못쓰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후배가 말했다. "철 드나 봐요." 싱글일 때부터 봐왔던 후배. 똑똑하고 야무지고 늘 최선을 다하는 후배라 예뻤다. 하지만 이날은 예쁜 것을 넘어 빛이 났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깨끗하기를 바라는 나와 같은 마음이 보여서였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회로 시선을 확장하며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실천을 한다. 나를 조금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육아. 나와 같은 생각의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육아. 그래서 육아는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