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내게 '쓰지 않았다'와 이음동의어는 '읽지 않았다'이기도 하다. 출퇴근 길에 책을 읽고 그 책이 재미있어 점심시간에도 '점심 먹었냐 안 먹었냐'의 간섭을 피해 홀로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그러다 보면 쓰고 싶은 말이 넘쳐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출퇴근 시간에 드라마나 예능을 보거나 무의미한 웹서핑을 하기 시작했고 늦은 밤까지 깨어있기는 했으나 역시 무의미한 웹서핑만 반복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일 좋아해서 제일 기다리던 봄이 너무 지지부진하게 오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아이의 학년말과 새 학기에 괜스레 긴장을 해서인지, 아니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회사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나이를 먹으며 열정이 식어서인지 글이 쓰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그 둘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쓰지 않는 삶을 산다고 누가 크게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좀 내버려두면 어떠랴 싶기도 하지만 귀찮은 내가 계속 못마땅했다. 가을에 이어 겨울까지 두 번의 부산 여행을 다녀왔고, 예정에 없던 1박을 추가한 강원도 여행도 있었다. 하이디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됐고, 참관수업과 총회에 이어 반모임까지 다녀왔다. 버닝썬 사태를 보며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자전거를 전혀 탈 줄 모르는 내가 자전거를 선물 받기도 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음'이라는 말로 미뤄두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알록달록할 수 있는 일상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총천연색의 꽃들이 한껏 뽐을 내는 4월이 왔다. 꽃샘추위가 기승이라 아직도 봄이 왔다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나 4월은 엄연히 봄이다. 제일 좋아하는 계절 봄에 제일 산뜻해지기로 한다. 귀찮다고 축 늘어져 있지 않고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게다가 내게는 이 봄과 딱 어울리는 새소식도 있다. 이번 주말이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닉네임이 아닌 내 이름 세 글자가 세겨진 글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내 책의 출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4월을 특별하게 보내자고 다짐하는 출근길, 문득 재미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회사는 부업, 본업은 작가로. 그러면 삶이 더 재미있겠다.'
내 이름의 책이 나온다고 해서, 과분하지만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버킷리스트를 이뤘다고 해서 달라질 일상은 아니다. 어김없이 7시 20분이면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할 것이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 퇴근을 할 것이고 집에 오면 하이디랑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고 그러다 하이디가 잠이 들면 내 시간을 갖게 되는 삶. 부업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내게 주어진 일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은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마음이 곧 모든 것을 좌우하기에 알록달록한 즐거운 인생을 위해 생각부터 달리해보려 한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18권의 책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책상. 한동안 외면했던 그 책들에 눈길을 준다. 어느 책부터 펼쳐볼까.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을 보니 봄이 오긴 오나보다. 내 책도 세상 밖으로 나오는 4월. 계절이 아닌 인생도 다시 봄이다. 이 특별하고 소중한 날들에 귀찮을 새가 어디 있으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나도 내 안에 알록달록 꽃을 피워보련다. 그래, 이제 정말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