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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의 취미, 일기 쓰기

by 여유수집가

하이디는 특별한 날이면 일기를 쓴다. 그렇다고 특별한 날이 대단한 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치어댄스 방과후 수업을 하는 매주 월요일도 특별한 날, 수영 학원에 가는 매주 금요일도 특별한 날이다. 물론 여행이나 연극 관람 등 종종 있는 이벤트들은 당연히 특별한 날에 해당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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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이니 일기를 써야 한다고 내가 시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일기를 쓴다. 평범한 토요일 아침, 외출 준비를 하는 내게 하이디는 말한다. "엄마, 나 일기장을 새로 만들었어." 학교에서 나눠준 숙제 일기장이 있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지? 아껴뒀던 어피치 스프링 노트 표지에 네임펜으로 '하이디의 일기장♡'이라고 써둔 것이다. 학교 일기장도 있는데 왜 또 만들었느냐고 물으니 당당하게 대답하는 하이디. "내 취미는 일기 쓰기잖아." 그러고는 앉아서 일기를 쓴다. 어제의 수영 수업에 대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학년 1학기 말부터 시작된 일기 쓰기 숙제. 주 1편 쓰는 숙제를 하기 위해 자주 전쟁을 치렀다. 보통 주말에 쓸 이야기가 생기니 일요일 아침을 일기 쓰는 시간으로 정했지만 그 시간이 조용히 지나가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쓰기 싫다는 하이디와 써야 한다는 엄마의 전쟁. 물론 학교 숙제라는 논리로 늘 엄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뒷맛은 개운하지 못했다.


그러던 하이디가 달라졌다. 요즘은 스스로 일기를 쓴다. 그것도 거침없이 한 페이지를 꽉 채운다. 전쟁 시기만 해도 어떻게 써야 하느냐, 힌트를 달라, 왜 안 도와주느냐, 옆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요구사항이 많았는데 이제는 요구사항도 없다. 그냥 '일기 써야지.'하고 책상에 앉아 다 쓰면 '다 썼다.'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다.


바로 학교문집 때문이다. 1학년 말 학교에서 가져온 문집. 그리 큰 규모의 학교가 아니기에 전교생의 글이 모두 담겨있었다. 그때부터 하이디는 닳고 닳도록 학교문집을 읽고 있다. 4월이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단 몇 페이지라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읽고 있다. 한동안은 외출할 때도 문집만 챙겨 다녔으니까. 다른 친구들은 진즉 책꽂이에 고정 자리를 차지했다는 문집. 자신의 글만 확인하고 덮었다는 문집인데 하이디의 문집은 너덜너덜해졌다. 보관용으로 한 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만큼. 그렇게 문집에 마음을 빼앗긴 후부터 하이디는 스스로 일기를 쓴다.


20190421_003314.jpg 여러 번의 이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내 국민학교 시절 일기장

일기를 쓰면 생각주머니가 커진다, 일기를 쓰면 속상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즐거웠던 마음은 더욱 오래간다, 일기를 쓰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애를 써가며 설명했던 내 이유들이 무색해졌다. 게다가 최강 동기부여 요소라고 여겼던 내 국민학교 시절 일기장도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은 이어졌는데 학교문집이 단번에 종전을 선언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2학년의 취미가 일기 쓰기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학교문집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고.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동기를 어떻게 갖게 할지는 알기 힘든 노릇. 그래서 다양한 환경,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아이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엄마는 또 궁리한다. 하이디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줄까. 그리고 또 생각한다. 그러면 아이는 어떤 일기를 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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