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게 샀지만 더는 쓰지 않는 이어폰을 선배의 2인용 텐트와 바꿨다고 했다. 후배에게 침낭, 매트, 테이블, 의자, 코펠을 빌렸다고 했다. 처음으로 자전거 캠핑을 떠나는 남편의 필요 물품 준비법이었다. 돈 드는 게 없으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남편이 서울에 혼자 남겨진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 잘했다고 했다.
첫 자전거 캠핑의 만족도는 높았다. 카톡으로 남기고, 전화로 말하고, 제주에 와서 또 이야기하고. 얼마나 좋았는지 2주 만에 다시 캠핑을 나섰다. 2주 만에 한 번씩 제주에 오고 있으니 첫 캠핑을 하자마자 곧바로 두 번째 캠핑을 나선 것과 같았다. 이번에도 역시 첫 캠핑과 같은 장비를 사용했기에 그저 이번에도 좋냐고 물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두 번째 캠핑 후 남편은 자신의 텐트 앞에 자리를 잡은 부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무 살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캠핑을 나온 아빠. 부녀는 오래 합을 맞춰본 듯 텐트를 치는 호흡도 저녁을 짓는 호흡도 딱딱 맞았노라 했다. 남편은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자신도 하이디와 그럴 거라는 포부를 내게 밝혔다. 이 역시 말릴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그럼, 아빠랑 딸이랑 단둘이 보내는 시간 좋지. 아마 그 부녀도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 거야. 그니까 제주 오면 하이디랑 오름도 올레도 같이 많이 걸어."
"그래야지."
앞 텐트 부녀에 대해 말할 때는 높았던 목소리가 '그래야지' 답할 때는 낮아진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 날 통화에서 남편은 캠핑 의자를 살 거라고 했다. 의자는 캠핑뿐만 아니라 자전거 라이딩을 할 때 가지고 다니면서 쉴 때 쓰면 된다고. 용돈을 아껴 사겠노라고. 용돈을 아껴서 산다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의자 하나니까. 그 정도는 뭐. 하지만 취미는 장비병이라는 진리가 남편만 비껴갈 리 없었다. 의자는 시작에 불과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길래 뭘 보나 봤더니 텐트가 줄줄이 보인다. 텐트 있지 않냐며 한마디를 했다가 새 텐트가 왜 필요한 지 한참 동안 설명을 들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니 짐이 가벼워야 하는데 지금 텐트는 무겁고......' 있는 텐트도 다시 사야겠다는데 후배에게 빌린 물건들은 어떨까. 내 눈치를 보느라 쉽게 말하지는 못하고 핸드폰으로 검색만 하고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내랑 딸을 제주에 보내 놓고 혼자서 외롭게 서울에서 돈을 벌고 있는데 자기가 사고 싶은 것도 저리 망설이게 해야 하나.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으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살 남편임을 알기에 슬쩍 물었다. 필요한 것을 다 사려면 얼마나 필요하냐고. '얼마!'라는 단답이 아닌, 이건 이래서 이 제품이 좋고, 저건 저래서 저 제품이 좋고의 설명부터 하는 남편. 그 설명에 고개 끄덕이고 나니 '얼마'의 답은 내 예상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이걸 이대로 다 사줘야 하나 망설이는데, 책꽂이에 잔뜩 쌓인 내 책들과 책꽂이를 벗어나 테이블에도 널린 내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로 도서관 이용이 쉽지 않다며, 전자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며 읽고 싶은 책은 망설이지 않고 잘만 사면서. 내 취미는 잘만 누리면서 남편의 취미를 막아서는 게 맞나. 나는 돈 좀 덜 드는 취미가 좋은 거고, 남편은 돈 좀 더 드는 취미가 좋은 것뿐 아닌가. 그가 용돈 일부를 보태는 조건으로 캠핑에 필요한 물건 구입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제 온전한 자신의 장비로 자전거 캠핑을 떠날 준비 완료. 여기서 캠핑 장비 이야기는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남편은 두 번째 캠핑에서 본 앞 텐트의 부녀를 말하기 시작했다. 제주에 살 때 하이디와 둘이 백패킹을 다녀야겠다고. 별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이 들려주는 최고의 자장가인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는 축복을 누려야겠다고. 그런 시간이 쌓여야 하이디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자신과 캠핑을 다녀줄 거라고.
화장실에 예민한 나는 애초부터 캠핑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를 끌어들이지 않아 좋았다. 부녀가 캠핑 갈 때 혼자만의 시간을 맘껏 누릴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참 생각이 짧았다. 두 명이 캠핑을 가려면 텐트를 뺀 장비가 하나씩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대찬성이라고 말한 내 입은 뒤이은 남편의 말에 앞으로 쭉 나왔지만 물릴 수는 없었다. '대찬성'이 그냥 '대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좋지! 대찬성! 완전 완전 대찬성이지! 하이디랑 둘이 함덕에서 잔다고 생각해봐. 매일 가던 함덕도 텐트에서 자면 다를걸. 밤새 파도 소리를 들으면 하이디는 뭐라고 할까? 아, 벌써 궁금하다. 게다가 비양도도 있고, 우도도 있고. 바다만 있나. 숲도 있고, 오름도 있지. 잘 곳이 어디 한둘이야."
남편과 하이디가 캠핑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기에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돈이 많이 든다고 말리기가 궁색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내가 잊고 있었던 남편의 상여금이 나왔다.
제주 바람을 막아서서 단단하게 텐트를 치고 나면 바다 위 저 먼 하늘부터 붉어지겠지. 황홀한 일몰을 바라보며 단출한 저녁을 먹고 나면 하늘에는 별이, 바다에는 고깃배가 반짝반짝 빛나겠지. 보이지 않는 밤바다를 귀와 코로 느끼며 잠이 들면 서서히 바다가 밝아지는 일출을 만나겠지. 텐트 밖으로 나서서 찌뿌둥한 몸을 쭉 늘이면 파도가 달려들 듯 밀려오겠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그리는데 그 둘이 점점 부러워졌다.
하루쯤 화장실 불편한 건 참을 수 있지 뭐. 농활 가서도 배낭여행 가서도 잘 참았는데 뭐. 잠자리 불편한 거? 장거리 비행기 이코노미석도 잘만 타고, 회사 다닐 땐 점심시간에 엎드려서도 잘 잤잖아. 장비 정리가 내게 넘어오지는 않겠지? 내가 못 미더워서 애지중지 구입한 남편이 다 할 거야. 그 둘 사이에 나도 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텐트는 2인용. 3인용을 다시 사라고 해야 하나. 텐트가 제일 비싼 장비인데. 이런 복잡한 내 마음을 모를 남편이 아니다. 그가 꺼낸 한 마디. "차박을 하면 돼."
내 차인 레이에 몇 가지 작업을 해서 차박이 가능하게 하면 된단다. 나는 차에서 자고 남편과 하이디는 텐트에서 자고. 이미 고삐 풀린 마음. 망설임 없이 'OK!'를 외쳤다. 어느새 나는 2021년 버킷리스트에 '캠핑하며 제주 누리기'를 적었고. 그리고 새해 첫날, 우리 가족은 첫 외출로 캠핑 용품 편집샵을 다녀왔다. 내 캠핑 의자를 사기 위해.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며 잠깐 주춤했지만 '세일해서 얼마'라는 점원의 말에 팔을 쭉 뻗어 카드를 건넸다. 나도 함께 캠핑을 하기로 한 건 다 신의 뜻이라 생각하면서. 이제 레이 평탄화 작업을 하면 된다. 제주에는 작업을 해주는 곳이 없어서 셀프로 해야 한다는데 그 어느 때보다 굳게 남편을 믿어 본다. "남편,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