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대신 홈트

by 여유수집가

떨리는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 앞에 섰다. 내 앞에 앉은 딸 하이디는 더 긴장했으리라.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수치를 말하던 선생님께서 하이디와 눈을 마주치셨다.


"코로나에 몸무게가 안 늘어난 경우는 처음 봤어."


씩 미소를 지으며 하이디에게 말씀하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모니터를 향해 등을 수그리고 있던 나는 몸을 쭉 일으켜 세우며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제주도로 이사 가서 열심히 걷고 있어요."


하이디는 초등학교 1학년 가을에 급격하게 몸무게가 늘어 성장클리닉에 다니고 있다. 치료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으로,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집에 간 김에 정기검진으로 들린 병원이었다. 내가 입을 열자 진료실 안이 술렁거렸다.


"제주도로 이사요? 여행이 아니고?"


선생님은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선생님 맞은편에 앉아 다른 모니터 위에 기록을 이어가던 전공의도 갑자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도 동그래진 눈으로 나와 하이디를 번갈아 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선생님은 다시 또 물었다. 코로나 때문이냐고. 코로나 때문은 아니고 원래 계획했던 이사라고 답하며 한동안 제주 이사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내게 머물렀던 시선을 다시 하이디에게로 돌리는 선생님. "니가 정말 부럽다. 제주에서 더 많이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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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닌다는 사실이 이렇게 뿌듯할 수가. 사실 하이디의 몸무게 관리를 위해 걸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른 걸음으로 15분, 아이 걸음으로 20분이 걸리는 학교를 매일 걸어 다녔다. 바다도 보고 귤나무도 보고 들꽃도 보며 걷는 길. 낭만이고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하이디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차 타고 다니잖아."

"엄마, 다리 아파."

"엄마, 너무 더워."

"엄마, 걷기 너무 힘들어."


차를 안 타는 것이 환경보호다.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 차를 타면 이런 풍경은 못 본다. 다리가 더 튼튼해지고 키가 클 거다. 집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 하이디를 어르고 달래며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지던 상황.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에 그동안 쌓인 미안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료실을 나오며 의기양양해져 하이디에게 말했다.


"그것 봐. 걷기를 잘했지!"


여름 끝자락에 운전면허를 딴 나는 2학기가 시작되며 직접 운전해서 하이디를 등하교시키게 됐다. 미안한 마음은 사라졌지만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괜히 하이디 볼이 더 빵빵하게 보이고 옷이 더 타이트하게 여겨졌다. 슬쩍 다시 걸어서 학교에 다닐까를 물었더니 질색하는 하이디. 편안함에 익숙해졌는데 나라도 그러겠다 싶어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사실 이건 하이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주에 와서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어난 내 문제이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에 다들 집에서 운동을 한다는데 그럼 우리도? 하이디와 함께 홈트를 하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요가지만 하이디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우선이니 하이디의 취향에 맞춰 다이어트 댄스를 택했다.


나보다 하이디가 더 적극적이었다. 태권도를 배웠으니 발차기를 잘한다고 발을 쭉쭉 뻗고, 수영을 배웠으니 팔 돌리기는 자신 있다며 어깨를 돌린다. 오른팔에 왼 다리를 뻗어야 하는 동작에서 오른팔, 오른 다리를 뻗지만 알아채지 못한 채 너무 잘 따라 한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둠칫 둠칫 박자도 탄다. 애교 춤이라고 이름 붙여진 동작에서는 윙크까지 보탠다. 내게도 귀여운 표정을 강요하면서.


무서운 코로나 확산세가 제주도까지 덮치면서 하이디는 온라인 수업을 이어가다 이제 방학을 했다. 집콕할 수밖에 없는 상황. 홈트는 더 빛을 발한다. 매일 하자고 했던 엄마의 말을 찰떡같이 지키는 하이디는 내가 귀찮아서 오늘은 건너뛸까 꾀를 부리면 내 등을 세게 떠민다.


"오늘 하루만 쉬자. 어제 홈트 했잖아."

"엄마가 매일매일 하자고 했잖아. 운동은 매일 해야 하는 거야."

"꼭 매일 안 해도 돼. 일주일에 세네 번만 해도 괜찮아."

"홈트를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잠도 푹 잘 수 있잖아. 아까 내가 짜증내서 엄마 스트레스 받았잖아. 그러니까 홈트를 해야지."


맞는 말만 하는 하이디에게 항복하고 영상을 튼다. 음악이 시작되면 어설픈 몸짓에도 최선을 다하는 하이디. 축 늘어졌던 내 몸도 탄력을 갖추며 움직인다. 하이디에게 뒤질세라 정확한 동작을 크게 크게 하면서.


겨울임에도 영상 18도까지 기온이 오른 날, 하이디에게 산책하자고 했다. 교래자연휴양림을 갈까,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을 갈까 친절하게 선택지까지 줬다. 단번에 싫다는 하이디. 나가기 귀찮단다. 운동해야 한다고, 사람이 걸어야 키도 더 크고 건강해진다고 했더니 홈트면 충분하단다. 휴양림은 오래 걸어야 하니 그런 걸까 싶어 동네 산책을 선택지에 추가했지만 그래도 싫단다.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직접 느껴보자는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홈트가 산책을 이긴다고? 조금씩 다른 콘텐츠를 선택하지만 매번 비슷한 홈트보다 바람도 햇살도 구름도 나무 빛도 매일매일이 다른 산책이 더 즐거운 일 아닐까? 바깥 햇살의 유혹에 홀딱 넘어간 나는 혼자 나가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 홈트보다 걷기가 훨씬 좋기에 나는 결국 혼자 집을 나섰다. 집에서 차로 함덕해수욕장까지 가는데 15분, 서우봉 둘레길을 걷는데 30분, 다시 돌아오는데 15분이니 한 시간이면 서우봉에 다녀올 수 있어 망설이다 삼십 분 동네 산책에 만족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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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날씨에도 녹지 않고 아직까지 그늘에 남아 있는 눈, 눈이 아니면 겨울인지 모를 정도로 눈 아래서 푸릇한 자태를 드러내는 풀밭, 여전히 나무에 달려 주황빛을 반짝이는 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서우봉.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이 풍경을 놓친 하이디가 못마땅하지만, 집에 남은 하이디 덕분에 아이 취향이 아닌 내 취향의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이제 하이디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차례. 엄마는 이미 충분히 운동했으니 오늘은 너 혼자 홈트를 하라고 했다. 엄마랑 해야 재밌다고 징징거리면 내일 산책을 조건으로 내걸려했는데 순순히 혼자서 하겠단다. 게다가 다른 때는 15분짜리 영상을 고르더니 오늘은 20분짜리 영상에 10분짜리 영상을 하나 더 하겠다고 한다. 아, 걷기보단 홈트라고 시위를 하는 건가.


하이디의 성장클리닉 정기검진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제주도에서 열심히 홈트 하고 있어요'라는 말은 어색하니, 이번 검진 결과가 좋더라도 차분하고 우아하게 '그렇군요' 대답만 해야겠다. 홈트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아름다운 제주도에 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