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구할 수 있었다

by 여유수집가

은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할머니와 이제 새치가 하나씩 발견되는 중년의 내가 나란히 섰다. 노란색이 곳곳을 채우는 곳, 제주 세월호기억관이었다.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맞는 자원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할머니는 내게 며칠 전 있었던 세월호 8주기 추모행사에 대해 들려주셨다. 다음 세대가 기억을 이어갈 수 있도록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기획하고 진행했다고.


청소년기본법에서는 9세부터 24세를 청소년이라 규정하고 있으니, 열두 살 딸도 청소년. 이곳으로 오며 아이에게 물었다.


“세월호가 뭘까?”

“배가 가라앉아 사람들이 죽은 거지? 수학여행 가는 언니, 오빠들이 탔다 그랬지?”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탄 커다란 배가 왜 가라앉았을까를 물었더니, 아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해서라고 답했다. 탄핵 집회를 데리고 다녔던 기억 때문이리라.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세월호기억관에 가서 다른 이유도 찾아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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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원 활동가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는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한 곳에 멈춰 섰다. 꽤 오랜 시간 가만히 서 있던 아이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당겼다.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아이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월호 침몰 타임라인 앞이었다. 손으로 눈 밑을 쓱 닦으며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아이는 말했다.


“엄마, 모두 구할 수 있었데.”


모두 구했다고 믿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를 쓰고 있는데 상기된 목소리가 TV를 켜라고 했다. 업무 시간에는 좀처럼 켜지지 않는 TV가 켜졌고 사람들의 눈은 모두 TV를 향했다. 처음에는 놀란 목소리가 여기저기 솟아나더니 곧 안도의 한숨이 걱정을 가라앉혔다.


TV 화면은 기울어진 배로 꽉 찼고, 하단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파란 바탕에 노란 글씨로 강조돼 있었다. 전원 구조가 확인되자 TV는 꺼졌고, 잠시 들썩였던 사무실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후가 되자 TV는 다시 켜졌다. 사무실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통화하는 사람도, 회의하러 가는 사람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일시 정지한 상태에서 TV 화면 속 사람들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다 구한 것이 아니었다고. 수색 중이라는 경직된 아나운서의 목소리 위로 화면 밖의 묵직한 한숨과 얕은 흐느낌이 겹쳐졌다.


내가 느낀 당혹감과 딸이 느낀 당혹감이 같았을까. 2014년 4월 16일 내가 뉴스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것처럼 2022년 4월 20일 아이도 눈물을 글썽였다. 분명 8년이 흘렀는데, 나는 아이를 달래는 희망적인 말을 하나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기억하자’라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이는 세월호 침몰 타임라인 앞에서 계속 궁금해했다. 왜 모두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는지. 왜 경찰은 사람들을 못 구했는지. 왜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도망쳤는지. 왜 사람을 구할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상만 찾았는지. 왜 1시간 20분 동안 아이들이 기다렸는데 피해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왜 네 살이었던 자신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물었다. 기억만 하면 되는지.


자원 활동가께서는 아이와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말씀하셨다. 기억한다는 것은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행동할 때 바른 방향을 찾게 해 줄 것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 안전한 세상이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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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세월호기억관을 나와 집으로 가던 나는 차를 꺾어 절물휴양림으로 향했다. 슬픔에 갇히지 않기 위해 걷고 싶었다. 숲길을 걸으며 아이는 아이답게 다시 활짝 웃었다. 연둣빛 나무로 둘러싸여 따스한 봄볕을 얼굴에 얹은 채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자 코끝이 찡했다. 눈 뒤로 차오르는 뜨거움을 아이의 표정을 따라 하며 날려 보냈다.


슬픔이 희망이 되기를. 찬란한 봄을 아픔 없이 누릴 수 있기를. 내년 이맘때 즈음엔 조금 더 나아진 기억을 가질 수 있기를. 숲으로 퍼지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소망했다. 맞잡은 여린 손이 오늘따라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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