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논 위로 아지랑이가 일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직진으로 내리 꽂혔다. 다섯 명의 청년이 논 안에서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피를 뽑는 중이었다. 그 다섯 명에 나도 섞여 있었다. 논 근처에는 제대로 가본 적 없는 도시 아이였던 내가.
대학생이 되고 첫여름방학, 선배들은 나를 농활로 이끌었다. 부족한 일손을 거들러 가자는데, 짐이 아닌 일손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경상도에도 살아봤고, 전라도에도 살아봤지만 모두 중소도시였다. 할아버지 댁은‘리’로 시골이었고 주변이 모두 논이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짓지는 않으셨기에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경험이 없어도 짐작되는 일이 있는데 농사가 그랬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몸 쓰는 것에 약한데 농사일을 잘할 리 없었다.
다섯 명이 같은 시각, 같은 출발선에 섰다. 허리를 숙이고 피를 뽑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레이스였다. 역시나 나는 꼴찌. 피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높고, 뽑아 올리는 손은 느려 더디게 나아갔다. 남들보다 허리 펴는 횟수를 줄여 느린 속도를 만회해보자고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냐는 타박, 일을 거들러 온 게 맞냐는 구박을 듣지 못한 척 외면했다.
폴짝! 바로 눈앞으로 초록 물체가 튀어 올랐다. 동공을 스쳤다고 느낄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허리를 번쩍 세우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서 후두둑 땀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사람들에게 아무 대답도 들려줄 수 없었다. 바짝 얼어있을 뿐이었다. 내 주변을 살펴보던 한 선배가 말했다. “개구리 때매 그래?”
개구리도 무서워하는 도시 아이, 애쓰는 마음은 예쁘지만 일머리는 없는 아이, 작은 손은 참 고운데 그 손이 하는 일은 답답하기만 한 아이였지만 어른들은 나를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내가 잘하는 것이 딱 하나 있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던 높은 톤의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부르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묘약을 얻으면 흘러나왔는데 그 묘약은 바로 막걸리였다.
콸콸콸. 냉면 사발에 막걸리가 채워졌다. 저 큰 사발을 내가 다 마실 수 있을까. 사발을 꽉 붙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짧게 심호흡하고 미간에 바짝 힘을 주며 꿀떡꿀떡 막걸리를 입으로 넘겼다. 텁텁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목을 간질이며 시원시원 넘어갔다. 땡볕에 달궈진 몸을 식히고, 허리 통증을 지우고, 지친 몸에 에너지를 채웠다. 막걸리는 술은 술이되 약도 됐고 밥도 됐다.
절반 정도 먹고 한 번은 쉬어야겠지? 아니었다. 꿀떡 꿀떡 꿀꺽! 목구멍은 최대한 크기를 키워 막걸리를 맞았고, 한꺼번에 냉면 한 사발을 다 들이켰다. 빈 사발을 머리 위에서 털며 입술에 남은 막걸리를 혀로 훔쳤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절로 새겨졌다.
“보는 내가 다 시원하네. 이제 노래가 술술 나오겠지? 나한테 한 곡 해줘.”
새참을 들고 온 아주머니께서는 내 입에 손으로 개운한 열무김치를 넣어주며 말씀하셨다. 다시 생기를 되찾은 내가 뻔뻔함까지 얻었으니 망설일 리 없었다. 바닥에 뒹구는 빈 막걸리 통에 수저를 꽂았다. 농활 와서 애창곡이 된 주현미의 ‘짝사랑’을 불렀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아~ 사랑인가 봐.”
아줌마와 아저씨의 박수 소리가 박자를 맞추고, ‘쿵짜작 쿵작’ 선배들의 코러스가 얹히자 내 몸도 목소리만큼 살랑거렸다. 거칠게 빨리 걸러진 술이라는 막걸리를 마시고 지치고 고된 마음은 빨리 거른 채 흥만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내 의도는 성공! 칼끝같이 날카로운 햇살을 막아낼 힘찬 의지를 갖고 다시 질퍽한 논에 발을 묻었다. 피 뽑는 속도가 더 느려질지라도 이번에는 허리를 더 많이 펴야겠다. 흥 담긴 노래를 퍼뜨려야 하니!
제목의 막걸리 사진: EBS_식품_1113, 한국교육방송공사, 공유마당 CC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