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끊긴 척

소주

by 여유수집가

차가운 겨울밤, 등은 차가운데 배는 따뜻했다. 뒤통수는 얼었는데 얼굴은 보드라웠다. 그의 너른 등에 업힌 탓이었다. 훅 올라간 높이가 좋아 대롱대롱 다리를 흔들었고, 그의 뜨끈한 목덜미가 좋아 볼을 비볐다. 그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지면 그 김이 흩어지기 전에 나도 숨을 내뱉었다. 우리 주위로 흩어지는 숨은 같은 향기를 품었다. 아니, 향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같은 술 냄새가 났다. 분명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다 만났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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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문 선후배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 동문은 아니기에, 그는 그대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겠노라 했다. 그가 없어서일까. 소주가 꼴깍꼴깍 넘어가지 않고 턱턱 걸렸다. 안주도 넘어가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점심 먹은 게 좀 얹힌 모양이었다. 외려 싸한 알코올이 체기를 내려보내 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한 잔 더, 한 잔 더 비웠지만 속만 아팠다. 쓰린 게 아닌 콕콕 쑤셨다. 이럴 때는 도망가는 게 상책이기에 몰래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분명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많이 마실 상황도 안 됐는데 몸이 휘청거리고 길바닥이 오르내렸다. 꽉 막혀 답답한 것은 속인데 머리로 가는 산소도 막혔는지 멍했다. 간판이 화려한 어느 가게 맞은편 연석에 주저앉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 맞은편인데 데리러 와. 도저히 못 걷겠어.”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숫자를 셌다. 겨울밤 차가운 공기와 내 안의 열기가 섞이며 몰려오는 잠에 숫자는 자꾸만 1로 되돌아갔다. 몇 번의 1을 반복했을까. 두툼한 손이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묵직한 고개를 들자 몽롱한 시선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가 들어왔다.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숨이 가라앉자 뒤를 돌아 등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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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걸음에 일렁이던 마음은 마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결국 울렁거리던 속이 벌컥거려 급하게 그를 멈춰 세웠다. 달랑거리던 다리를 거칠게 휘두르며 그에게서 뛰어내려 속을 게웠다.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등을 두드리는 그의 손을 치우고 어디로 후다닥 숨고 싶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그가 옷소매로 내 입을 닦았다. 너무 쪽팔려서일까, 너무 다정해서일까 눈물이 났다. 토사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 엉엉 울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는 반대쪽 소매로 내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겉옷은 야무지게 걷고 티셔츠로 닦는 것을 보니 샐쭉 웃음이 났다. 취한 술 때문인가 아픈 속 때문인가 마음이 들쑥날쑥했다. 아, 그래! 그도 내가 쪽팔리겠지.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밤은 깊었고 거리는 조용했다.


“물을 살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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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소리까지 터지며 웃음이 났다. 나를 쪽팔려하지 않는 그가 좋았다. 더러워도 아무렇지 않게 쓱 내 입을 닦아준 그가 좋았다. 눈물 대롱대롱 달고 시큼한 냄새 풍기며 웃는 내게 입 맞추는 그가 좋았다. 이번에는 살살 걷겠노라며 다시 등을 내미는 그가 좋았다. 그리고 다음 날 소주 세 병에 필름이 끊겼다며 어제 일 기억이 안 난다고 시치미 뚝 떼는 그가 좋았다.





제목의 소주 사진: Image by gteddy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