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우면 무슨 맛이니

정종

by 여유수집가

귓바퀴가 빨갛게 얼어붙은 겨울밤, 조금 미련이 남았던 우리는 2차로 어묵바에 들렀다. 집에 가기 전 몸만 살짝 녹이자는 의도였다. 물론 살짝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일행 네 명 중 세 명은 뜨거운 정종을 시켰고, 한 명은 차가운 정종을 시켰다. 그 남다른 한 명이 바로 나였다.


“술만 잘 마시는 거지 술맛은 모르는구나?”

“그러게, 차가운 정종은 무슨 맛이냐?”
“그래, 정종은 좀 뜨거워야 향도 더 잘 느껴지고 제대로지.”

“맞아, 따뜻해야 단맛이 더 잘 돌고 부드럽다.”


food-g976624ee6_1920.jpg Image by hyeinhy from Pixabay

하지만 안주가 따뜻한 어묵인걸. 따뜻한 안주에는 차가운 술이, 차가운 안주에는 따뜻한 술이 궁합 아니던가. 회를 먹는데 정종을 시켜야 했다면 나도 뜨거운 정종을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는 어묵바. 이미 술이 나오기 전에 어묵 국물을 마셨고 속은 뜨끈하게 데워졌으니 차가운 술이 들어가야 했다. 내 취향으로는.


물론 병으로 술을 시켰더라면 다수의 법칙을 따라 나도 잠자코 따뜻한 정종을 마셨을 거다. 하지만 이건 잔술. 내 취향대로 선택이 가능한 것 아니었던가.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니 한 마디 정도 지적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들 기준에 더 좋은 맛을 알려주고 싶은 좋은 의도일 테니까. 하지만 술을 마실 때마다 무슨 맛이냐며 비아냥대면 어쩌라는 건지.


이쯤 되면 타박하는 말이 듣기 싫어서라도 뜨거운 정종을 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고집이 더 세지는 단계까지 술이 올랐기에 꿋꿋하게 차가운 정종을 고집했다. 게다가 뜨거운 안주가 아니더라도 사실 나는 살얼음 서린 정종의 청량한 맛을 더 좋아했다.


“아가씨는 개운하게 먹는 게 좋나 보지.”


AdobeStock_476142071.jpeg Image by Chiristsumo from Adobe Stock

열 명 남짓 앉으면 꽉 차는 작은 가게라 사장님은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계셨다. 그러다 내 편을 들어주셨고. 머쓱해진 일행들은 그제야 술 온도로 타박하는 것을 멈췄다. 덕분에 나는 편안히 차가운 정종을 한 잔 더 주문했다.


평소 술자리에서 나는 자작을 즐긴다. 술을 좋아하고 못 마시는 편도 아닌 나와 달리 상대는 어떨지 모르기에 섣불리 권하지 않는다. 이미 주량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상대의 컨디션을 확신할 수 없기에 나만 마실 뿐 마시라고 하지 않는다.


술은 다른 음식과는 달리 많이 먹으면 실수가 따라온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 감당할 만큼만 스스로 선택해서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나도 상대도 같이 술자리를 더 오래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콧노래 흥얼거려야 할 귀갓길에 뻗어버린 상대를 낑낑 끌고 가야 하는 건 끔찍하니까.


주량도 주종도 온도도 그저 개인의 선택에 맡기면 안 되는 것일까. 즐겁자고 마시는 술인데 왜 꼭 강요가 섞이는 걸까. 냉면 사발에 소주를 부어 시계방향으로 돌려가며 마실 때도, 맥주잔에 소주가 가득 채워져 원샷 소리와 함께 건네질 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막걸리를 마시다 소주를 마시면 숙취가 심해 싫다 해도 소주로 잔을 채우고, 맥주를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기에 소주를 마시겠다 해도 맥주를 따라줄 때는 짜증이 났다. 마시고 취하면 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냐며 타박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면 왜 자꾸 도망가냐고 하면서도 왜 억지로 권하는 건지. 술에 따라붙는 강요가 싫었다.


“어묵 좀 그만 먹어요!”


팔도음식 (54).jpg 팔도음식 (54), 채지형, 공유마당 CC BY

내 앞에 놓인 어묵 꼬치는 고작 세 개, 일행들 앞에 놓인 어묵 꼬치는 산더미. 술값을 균등하게 나눠 내기로 했으니 안주발은 타박해도 되는 것 아닐까. 술의 양이나 취향 강요가 아닌 ‘안주의 양’ 타박이라며 합리적인 척 일행들에게 눈을 흘겼다. 나보다 덩치 큰 일행들은 자신들의 타박보다 내 타박이 더 치사하다 여겼겠지만. 그렇다고 일행들이 내 말은 들은 것은 아니다.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묵을 더 집었다. 내가 그들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정종을 고집했던 것처럼.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신 뒤 가게를 빠져나온 우리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모두 제 두 발로 걸었고, 누구에게도 화풀이 없이 모두 웃으며 걸었다. 타박이 타박에서 끝나고 강요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따뜻한 온도로 청량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제목 사진: Image by siro46 from Adobe 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