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동기에게 내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연락이 하고 싶어 졌단다. 친하게 지내다 연락이 끊긴 사이도 아닌 그저 술자리 몇 번 같이했던 선후배 사이였을 뿐인데 왜?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연하게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말하며 세 개의 날짜 선택지를 내미는 선배에게 휩쓸려 약속이 정해지고 말았다.
동기에게 물었다. 어쩌다 선배에게 내 소식을 전하게 된 거냐고. 동기 모임 직후라 사진을 보여줬더니 나에 대해 묻더란다. 잘 나가는 선배니 잘해보라고 동기는 말했다. 나중에 잘 되면 자기 덕분이니 잊지 말라고 덧붙이며.
내게도 있는 그 사진을 들여다봤다. 볼이 빨개진 채 활짝 웃는 내가 보였지만 대학 시절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그저 동글동글 평범하기만 했다. 화장도 안 한 나를 타박하다 화들짝 놀랐다. 그저 귀찮기만 하던 약속이 달라져 버린 것 같아서. 동기의 말처럼 선배의 관심은 정말 ‘남녀 사이’를 예상한 것일까. 그럼 나도 ‘남녀 사이’를 기대하게 된 것일까.
Image by Jason Leung from Unsplash대학 때는 삼겹살을 구웠으니 소고기 정도는 구우려나 했지만 차근차근 올려졌다 가져가는 접시 속에서 소고기를 썰었다. 늘 술자리에서 만나던 사람이니 와인이라도 한잔 곁들이면 좋겠는데 선배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 흐르듯 대화가 잘 이어지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런 만남에서는 당연한 추억팔이 없이 툭툭 던져지는 근황 토크는 쉽게 끊겼다.
처음에는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보자고 한 사람도 선배고, 과묵한 사람도 선배니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비싼 밥이니 맛있게 먹고 가면 그만이었다. 가벼워진 마음은 기꺼이 음식 품평을 꺼냈다. 이건 이래서 맛있고, 저건 저래서 아쉽고. 이건 양이 조금 부족하고, 저건 좀 더 구웠으면 좋겠고.
“그래, 여전히 밝아서 좋네.”
조금 전에는 꽤 많은 불평을 읊어 눈치도 좀 보였는데 이게 밝다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은 질문도 감추지 않았다.
“지금 불평도 제법인데 밝다고요? 까칠하거나 까다로운 것 아닌가?”
자신이 그리 편한 사람도 아닐 테고 메뉴판 봤으니 비싼 식사 가격도 알 텐데, 맛 평가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탐구하는 자세로 음식을 평하는 모습이 밝아 보였다고. 밝다는 말이 조금 안 어울리면 당당해 보인다고.
디저트까지 여러 개의 접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선배는 처음으로 길게 목소리를 들려줬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호기심은 맹렬해졌다.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별로 안 친했잖아요.”
“그땐 너 사귀는 사람 있었잖아. 지금은 없다며.”
Image by Josh Calabrese from Unsplash선배는 스트라이크 존에 광속구를 꽂았다. 예상하지 못한 돌진에 휘청거렸다. 나불대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피식 웃은 그가 말했다.
“어서 마저 먹어. 너 좋아하는 술 마시러 가자.”
‘좋아하는 술’이란 말에서 ‘술’은 지워지고 ‘좋아하는’만 남아 귀에 맴돌았다. 그냥 맛있는 밥만 먹자던 마음이 요동쳤다. 전부터 지켜봤음을 드러내는 여전하다는 칭찬 때문일까. 자꾸만 눈길이 닿던 매끈한 손가락이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테이블을 두드린 때문일까. 아니면 쿵하고 박힌 직설적인 표현 때문일까.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지만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입 역시 제어가 되지 않았다.
“저를 좋아하셨던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관심 정도 있었지.”
갑자기 힘은 왜 빠지는지. 멍한 나를 두고 선배가 먼저 일어섰다. 내 등 뒤에서 내 의자를 짚은 그의 묵직한 저음이 내게 흘러들었다.
“위스키 마시니? 오늘은 너 좋아하는 술 대신 나 좋아하는 술 마셔도 되겠지?”
Image by Dylan de Jonge from Unsplash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켜졌다. 너무 독하고 너무 비싸 즐기지 않던 위스키를 나는 오늘 즐길 수 있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술 대신 그가 좋아하는 술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아직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벌써 어지러움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