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풍미는 숙성에서 나오고

위스키 ②

by 여유수집가

술은 반복되는 일상에 웃음이든 울음이든 들썩임이든 흐느낌이든 감정의 굴곡을 만들어주고, 한 겹 두 겹 씌워진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어 좋아한다. 감정의 굴곡이든 가면의 벗겨짐이든 편안한 분위기에서 더 잘 작동하기에 소주를 제일 좋아했다. 부담 없이 홀짝홀짝 마실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선배와 마주 앉은 바에서는 편하게 술을 마실 수도, 감정의 굴곡을 드러낼 수도, 가면을 벗어버릴 수도 없었다. 월넛 같은 진한 나무색 인테리어에 낮은 조도는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 음악은 우아함을 권했다. 게다가 마시는 술마저 고가의 위스키라서 홀짝홀짝 마실 수도 없었다.


위스키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맨 정신에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소주와 맥주가 몸속 가득 채워져 아슬아슬 넘치기 직전 겨우 몇 번 마셔본 것이 전부이기에 맛도 향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목구멍을 태우며 내려간 뒤 잔기침을 만들어낸 기억만 남았을 뿐이었다.


“향 먼저 맡아봐. 입 안에서 조금 굴리다 넘기고.”


Image by Kelly Visel from Unsplash

위스키는 거의 마셔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선배는 선생님을 자처했다. 마시는 방법에서 시작해 ‘생명의 물’이라는 말에서 위스키란 이름이 유래됐다는 것을 지나, 얼음 위에 술을 따르면 바위에 따르는 것처럼 보여 얼음 잔에 마시는 것을 온더락스라고 부른다는 것을 넘어, 위스키가 숙성되는 과정에서 오크통에 흡수되거나 증발하며 매년 양이 조금씩 줄어드는데 이런 현상을 ‘천사의 몫’이라 부른다는 것까지 줄줄 말을 이었다.


클래식 음악 위에 얹히는 선배의 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왜 선배와 대학 4년 내내 술자리 몇 번만 같이 했던 사이에 머물렀는지가 떠올랐다. 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지적할 때만 입이 열리던 사람이었다. 예술영화를 즐겨보는 내게 히치콕을 알려주던 것은 그나마 좋은 기억이었다. 문제는 술자리 내내 한번 열린 입이 멈추지 않고 히치콕 이야기만 했던 거지만.

사법고시를 그만두고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내게 왜 기레기를 하려 하냐며 언론의 문제점만 읊던 기억, 결국 금융사에 취직한다는 내게 매번 너무 쉽게 포기한다며 내 입장은 들을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비난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런 성미를 알기에 술자리에서도 일부러 멀리 앉곤 했었는데 왜 그 기억을 잊었던 걸까.


Image by Edgar Chaparro from Unsplash

잘 나가는 선배의 지위와 멀끔한 외모 때문이겠지. 위스키를 넘기며 찌푸려진 미간은 40도의 독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직업과 외모에 혹해서 ‘관심 있었다던’ 선배의 한 마디에 설레서 그 관심을 더 받아보려 얌전 빼며 앉아 있는 나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선배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아챘고, 그 이유가 여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잘 보이려는 노력을 그만해야 하는데 여전히 나는 살포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척’을 했다.


“첫맛이 달콤하지 않아? 나는 넘기고 났을 때 싸함이 날카롭게 치고 올라왔다가 바닐라 향이 싹 감싸면서 스파이시함이 입 안에 오래 남는 게 좋더라.”

그래, 이렇게 위스키 맛을 설명하는 걸 내가 어디서 들어보겠어. 오늘은 위스키 수업으로 생각하면 되지 뭘. 내 돈 쓰는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부러 생긋 짓는 미소는 달고 있었다. 직업과 외모를 외면하지 못하고 선배 따라 맛을 느껴보는 흉내를 내며 어색함을 수줍음으로 포장했다.

조금씩 몸이 뜨거워지고 이성이 풀려가며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는 내려가는데 선배는 달라지지 않았다. 위스키를 마시면 마실수록 말은 늘었고, 그 말은 모두 내 선호와 취향을 비껴갔다. 게다가 차오르는 위스키만큼 쓰는 돈만큼 허세를 채우는지 위스키 애찬론을 넘어 위스키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숙성되어 깊은 풍미를 가지는 술이 위스키라며 그래서 비싼 가격도 수긍이 된다는 선배인데 선배와 위스키는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이 마음을 꼭꼭 숨겼다. 남녀사이는 아닐지라도 잘 나가는 선배를 친한 사이로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위스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목의 사진은 Katherine Conrad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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