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마신 낮술

샹그리아

by 여유수집가

여자 세 명이 레스토랑에 등장했다. 익숙한 듯 빠르게 메뉴를 고른 그녀들은 당연하듯 음료도 함께 주문했다. 샹그리아였다. 대형 파라솔 아래 앉은 그녀들의 발끝으로 미처 가려지지 못한 뜨거운 햇볕이 닿는 한낮이었다.


“보드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핏빛 와인에 조각난 과일이 잔뜩 든 유리병을 들고 온 주인이 말했다. 어미는 높였지만 어조에 실린 가벼움은 그녀들이 이곳 단골임을 짐작하게 했다.


“이건 그냥 마시고, 다음 주문부터 넣어주세요. 많이 넣으셔도 돼요.”


삼 주가 흐른 뒤 여자 세 명이 같은 레스토랑에 등장했다. 이번에도 익숙한 듯 빠르게 메뉴를 고른 그녀들은 당연하듯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물론 앉은자리도 같았고, 앉은 시간마저 비슷했다. 하지만 샹그리아를 들고 온 주인은 달랐다. 보드카를 언급하지 않았다.


삼 주 전 그녀들과 지금의 그녀들은 구성이 달랐다. 한 명만 같을 뿐 두 명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삼 주 전 그녀들은 술을 마시며 친해진 친구들이었고, 지금의 그녀들은 커피를 마시며 친해진 친구들이었다.


luis-gonzalez-sosa-7p90ROoW_iw-unsplash.jpg Unsplash의 Luis González Sosa

샹그리아는 상큼하고 달달하고 시원한 맛에 한낮과 딱 어울리는 음료이면서 주류이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마실 때는 주류에 방점을 찍고,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마실 때는 음료에 방점을 찍었다. 음료와 주류에 걸쳐 있는 특성상 애미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로 부담스럽지 않았고, 진한 붉은빛에 퐁당 빠진 과일들이 예뻐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니 우아한 레스토랑에서의 반주로 흡족했다.


주류에 방점을 찍을 때는 레스토랑이 와인바보다는 펍이 됐고, 음료에 방점을 찍을 때는 레스토랑이 레스토랑다웠다. 나는 한 사람이니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같은 상황도 다르게 표현됐다. 보드카 잔뜩 든 샹그리아를 마실 때는 내 안의 거침이 마구 튀어나왔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거름 없이 쏟아졌다. 주어진 그대로의 샹그리아를 마실 때는 나이다운 세련된 언어로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며 말을 꺼냈다.


사실 술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느 시기에 만나 친해진 친구들인지의 차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친한 관계는 여물지 못한 시절의 온갖 좌충우돌을 다 알고 있기에 내 밑바닥을 그 시절의 언어로 그대로 다 까 보일 수 있었고, 사회에서 만나 친한 관계는 좀 더 다듬어진 뒤의 내 모습만 알고 있기에 다듬어진 모습에서부터 어떻게 더 잘 다듬을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면 됐다.


그렇다고 두 우정의 깊이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길고 짧음은 달랐지만, 신뢰의 정도는 같았다. 다만, 오랜 친구는 오랜 연애사를 알고 있으니 연애가 더 중심 화제였다면, 사회 친구는 회사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니 회사생활이 더 중심 화제였다. 결혼하고 난 뒤에도 화제의 차이는 존재했다. 오랜 친구들과는 남편, 시댁 이야기를 더 많이 했고, 사회 친구들과는 언제까지 회사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더 많이 이야기했다.


ralph-ravi-kayden-f8Z6fMhLXUE-unsplash.jpg Unsplash의 Ralph (Ravi) Kayden

하지만 같아지는 순간도 있다. 육아가 두 관계 모두에 포함된 지금은 오랜 친구들과도 사회 친구들과도 육아 이야기가 중심 화제가 된다. 그러고 보니 이 단골 레스토랑에 육아를 하며 만난 친구들과는 함께 가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간다면 나는 보드카를 넣어 샹그리아를 마시게 될까, 주어진 그대로의 샹그리아를 마시게 될까. 오늘따라 오래도록 찾지 않았던 그 레스토랑의 샹그리아 낮술이 그립다. 아니, 그 샹그리아 낮술을 같이 마시던 친구들이 어쩌면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제목의 사진은 Unsplash의 Divya Agrawal